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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2. 2019

[스페셜] 추억은 방울방울! 고전 문구 찾아 삼만 리

뉴트로 탐닉일기6


글·사진 김선화     





요즘 떠오르는 이색 취미는 ‘고전 문구 수집’이다. 고전 문구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옛날 문구를 일컫는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기 위함일까. 최근 고전 문구를 수집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는 사회 현상을 다룬 기사도 줄을 잇는다. <달의 요정 세일러문>, <카드캡터 체리> 등 인기 애니메이션의 고전 문구는 비싼 값에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고전 문구를 모으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운동화만 챙겨 신고 집 근처 문구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막상 찾으려니 문구점이 없었다. 근처에 ‘문구점 하나 정도는 있겠지’란 건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 많던 문구점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득템! 독수리 5형제!

고전 문구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문구점을 찾는 게 관건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문구점이었던 ‘보성문구사’는 이미 사라진 상태. 언젠가 찾아가야지 하면서 매번 다음을 기약하며 미뤄둔 게 화근이었다. 고전 문구를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임을 직감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서울 지역에서 고전 문구를 찾는 건 힘들다고 한다. 이미 고전 문구 수집가들이 탈탈 털어간 탓이다. 고전 문구를 아득바득 찾기로 마음먹었는데 가능성을 점친 게시글을 보니 조금 우울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낙담하며 포기할 순 없었다. 서울에서 고전 문구를 찾기가 어렵다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보기로 했다. 오랜 조사 끝에 방문한 곳은 동인천역 인근에 있는 ‘칠성문구사’다. 


‘칠성문구사’의 톤 다운된 비취색 간판은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다. 또 큼지막한 글씨는 세련미는 떨어졌지만 투박한 멋이 있었다.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올 법한 예스러운 문구점이다. 간판부터 레트로한 감성이 물씬 들어서 왠지 고전 문구가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매장 안을 둘러보니 예상대로 고전 문구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90년대에 만들어졌을 거로 추정되는 철 필통엔 빈티지한 흔적이 가득했다. 이 밖에 다이어리, 색연필, 볼펜 등 다수의 문구가 고전 문구였다. 발굴하면 할수록 세월을 품은 고전 문구가 쏟아졌다. <원피스>의 루피가 원피스를 찾아낸 기분이 이러할까. 취재하랬더니 결국 고전 문구에 푹 빠져 옛날 문구를 왕창 사버리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변명을 하자면 추억에는 장사가 없다. 결국 추억을 이기지 못하고 <올림포스 가디언> 문구 세트와 연필 여러 자루를 샀다. 연필은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내 나이보다 아버지의 나이보다 더 오래됐을 거라 추정되는 <독수리 5형제> 연필도 있었다. 2000년대 레트로한 물건을 찾다가 1970년대에 만들어졌을 법한 물건을 사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쯤 되면 문구점이 아니라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알고 보면 ‘칠성문구사’는 반백 년 역사를 품은 곳이다. 1대 주인 이칠성 사장님께선 10대 때부터 문구점 일을 해오셨다고 한다. 지금은 1대 사장님의 건강 문제로 아드님께서 가업을 이어받는 중이다. 아드님께 ‘칠성문구사’가 유독 고전 문구가 많은 까닭을 물으니 “오랫동안 장소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기자임을 조심스레 밝히자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운 물건을 손수 꺼내주셨다. 오래된 고전 문구 가운데 24색 크레파스는 단연 눈에 띄었다. 포장지 위엔 ‘국민학생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귀한 물건을 꺼내주셔서 감사했다. 감사함과 동시에 덜컥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사진을 찍는 내내 수전증을 앓는 것처럼 두 손이 자꾸만 떨렸다. 설령 물건이 망가지지 않을까 흠집이라도 날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이 밖에 물통, 나무 주산, 책받침 등 나이를 추정할 수 없는 물건을 아낌없이 꺼내주셨다. 먼 옛날의 물건을 보니 낯설고 신기했다.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코코문구’다. ‘코코문구’ 역시 한자리에서 반백 년 가까이 제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긴다.  내부로 들어가면 여태껏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기이한 곳이 펼쳐진다. 동굴에 들어가본 적은 없지만, 흡사 동굴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문구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다. 진열의 기능을 잃은 문구가 낡은 노끈 하나에 의지한 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상황이 이런즉, 손님들이 청소를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며 사장님이 너스레를 떨었다. ‘코코문구’의 사장님은 레트로한 가게처럼 사람도 참 레트로했다. 물건을 사든지 말든지 별 관심이 없으셨다. 물건 구입을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여기 살 만한 거 없어. 돌아가.”라며 발길을 돌리게 했다. 가게도 사장님도 모두 독특했다.


그런데 눈앞에 쌓인 고전 문구를 두고 떠날 순 없었다. 컴컴한 동굴 같은 곳에서 고전 문구 찾기 서바이벌을 펼쳤다. 집는 족족 10년이 족히 넘는 문구가 즐비했다. <유희왕> 카드며 띠부띠부씰 등 온통 옛날 물건투성이었다. 많아도 너무 많아 쭈뼛거리자 비로소 사장님께서 몸을 움직이셨다. 툴툴대면서 동시에 상냥하게 “찾는 물건이 있냐.”며 고전 문구 찾기에 가담해주셨다. 보물찾기하듯 물건을 찾는 동안 사장님과 친해지기도 했다. 사장님께서 살아온 인생사를 구수한 입담으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요즘 들어 고전 문구를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HOT 고전 문구만을 찾는 열성 팬이 있는가 하면 가족 단위의 손님이 물건을 사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사장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따로 있다. 2인 1조 고전 문구 수집가의 이야기다. 이들은 고전 문구 수집 자체가 직업이라 전국 방방곡곡을 떠돈다고 한다. 예전에는 문구점을 문구 점방이라고 불렀다는데, 아직까지 나무 미닫이를 이용하는 문구 점방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전해 듣자니 고전 문구를 이용한 벌이도 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모두가 문구점을 관둘 때

이야기하는 사이 사장님과 함께 젤라비 게임, 다마고치 등 많은 고전 문구를 발굴해나갔다. 먼지가 켜켜이 앉은 고전 문구는 죄다 장바구니에 담았다. 만 원 한 장도 벌벌 떨던 내가 소위 말하는 탕진을 시도하게 됐다. 어릴 적엔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던 물건을 지금은 어른이 돼서 사고 있다. 부자가 된 듯 일종의 보상심리가 발동한 것 같다. 나중에 엄마가 알면 “애도 아니고, 그 나이 먹어서 무슨 문구”냐고 잔소리할 것을 안다. 낭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사장님 말마따나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시대의 흐름으로 문구점이 당장 내일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이곳을 365일 평생 지킨 사장님도 재개발로 문구점을 닫을지 모른다고 하셨다. 한때 인천엔 2500여 곳의 문구점이 있었지만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지금은 ‘코코문구’와 일부 가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모두가 문구점을 관둘 때 사장님은 한 평 남짓한 좁디좁은 문구점에서 홀로 반백 년을 견디셨다. 얼마나 오랜만에 사람과 이야기를 한 것인지 사람 반가워하는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떠날 땐 걸음걸음마다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어서 배다리 헌책방 주위의 문구점 탐방에도 나섰다. 오랜 내력을 가진 문구점임에도 불구하고 매장 내부의 물건은 비교적 최신 문구로 채워진 편이었다. 옛날 문구점이 고전 문구를 갖고 있을 가능성은 높지만 무조건 ‘고전 문구를 가지고 있다.’로 직결되는 건 아니다. 실제 고전 문구 탐방을 떠나보니 발품을 팔면 팔수록 좋았다. 너무 인터넷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알짜배기 옛날 문구점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러분도 시간이 허락된다면 고전 문구 탐방을 떠나보시길. 어쩐지 고전 문구를 예찬하는 글이 되어버렸지만, 다 큰 성인들이 문구점에 들러 쓰지도 않을 귀여운 문구나 장난감을 구매하는 것은 단순히 추억팔일만은 아닐 것이다. 무용하지만 귀여운 것, 당장 학교나 직장에서 쓸 필요 없지만 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해주는 것. 어른의 걱정과는 또 다른 고민을 품고 매일 하교길에 들렀던 그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우리는 오늘도 하루를 이겨낸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문제집 말고 잡다한 것들을 손에 들고 최소한의 용돈 안에서 한껏 기쁨을 만끽했던 그 시간들을 매만지며 나는 문구점 밖을 나온다.         


  


위 글은 빅이슈 11월호 21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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