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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2. 2019

[스페셜] 내가 아직 인어를 쫓는 이유

뉴트로 탐닉일기5


글·사진 요니  사진제공 서울미디어코믹스     





내가 인어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2012년이었다. 손과 마음이 가는대로 짬이 날 때마다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로고의 인어 이미지부터 시작해서 시공사 디스커버리의 <사이렌>이란 책까지, 끌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인 물건들이 꽤 많아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중 하나가 된 <인어 시리즈>(타카하시 루미코 지음)도 이때 처음 만났다. 일본에서 1984년에 연재되었다고 하니 이미 출판된 지 오래된 만화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 조만간 절판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2004년 이래로 한국에서도 꾸준히 발행되고 있는 걸 보면 숨은 팬이 많은가 보다. 30년도 더 된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이 아직도 재미있다는 건 그만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뭔가를 확실하게 건드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는지. 

만화 <인어 시리즈>는 <메종일각>, <란마 1/2>, <이누야샤> 등 수많은 히트작을 그렸고 지금도 그리고 있으며, 그림체만으로도 살아 있는 레트로인 일본의 국민 만화가 타카하시 루미코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만화를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워낙 대중적이고 친근한 느낌의 러브 코미디나 판타지 장르 작품들로 유명해진 작가라, 인간의 탐욕과 외로움, 증오, 잔인함 등 마음의 그림자를 다루는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그늘에 가려진 건지도 모르겠다. <인어 시리즈>는 옴니버스 단편 모음이라 에피소드마다 굉장히 밀도 높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래서인지 미완성된 세 권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 만화의 중심엔 맹독이자 불로불사 명약인 ‘인어 고기’가 있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인어를 쫓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어 고기를 먹고 급격한 신체 변화를 견디지 못해 죽거나 나리소코나이(되지 못한자, 괴물)가 된다. 몇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인어 고기를 먹은 순간의 나이와 외모 그대로 불로불사 하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인 유타는 이미 500살이고 여자 주인공 마나는 이제 막 인어 고기를 먹고 불사신이 된 소녀이다. 

인어 고기를 먹고 불로불사하게 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외로움과 고독에 허덕이고, 평범하게 늙어 죽기 위한 방법을 알고 싶어 몇 백 년을 걸쳐 인어를 찾아다닌다. 인어들은 아름다움과 젊음을 되찾기 위해 인간 여자 아이를 납치해 인어 고기를 먹인 뒤, 불사신이 되는 데 성공한 소녀의 고기를 탐한다. 한편에선 인어 고기의 비밀을 아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저마다 온갖 추악한 욕망을 안고 인어를 쫓는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에피소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쌍둥이 자매 중 동생이 아픈 언니에게 인어 고기를 먹인 에피소드, 둘째는 어린아이일 때 인어 고기를 먹게 되어 그 몸 그대로 800년 동안 엄마를 대체할 여인들을 만들며 세상을 떠돌아다닌 아이 이야기. 셋째는 25년 전 헤어진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맹독인 줄 알면서도, 유난히 아들을 빼닮은 손자를 유괴해 키우며 인어 고기를 먹이려는 여자의 이야기다. 증오와 복수심 등 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강렬한 감정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이란 공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해지고 졸렬해지는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자처하는가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낱 인간은 호기심이나 개인의 문제 해결 돌파구로 불로불사의 몸을 갖고 싶어 하지만, 정작 인어 고기를 먹고 불사신이 된 인간들은 처절한 외로움에 허덕이면서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들은 외로움 때문에 타인을 죽이려 하고 음모에 빠뜨린다. 또는 자신과 똑같은 불사신을 만들어 위안을 삼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인어 고기를 먹인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30년도 더 된 이 만화를 아직도 반복해서 읽고 또 읽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수명이 연장되었고 현실에서 불로불사의 몸을 손에 넣게 될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를 현재에도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공포는 외로움이 아닐까. 어쩌면 인어 고기란 ‘극복하지 못한 상처를 받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상징하는 것 같다.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인간은 혼자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기분에 사로잡힌다. 시간 때문에 겉모습이 변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때의 상황과 기분으로 윤회하는 것이 불로불사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급격한 문명과 시대 변화가 휘몰아치고 있는 지금, 뉴트로가 대세인 이유는 현재엔 보기 힘든 오래된 새로움 속에  안정감이 함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변화에 가속도가 붙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 때문에 문화 속에서라도 안정감을 찾고 있는 걸까? 작가의 파워가 있지만 사실 뉴트로라고 하기에 이 작품은 향유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애매하다. 더군다나 레트로 만화 이미지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오르는 SF나 러브 코미디 장르도 아니고 호러다. 하지만 내게는 볼 때마다 더 깊은 공감을 일으키며 새롭게 태어나는 작품이기 때문에 뉴트로로서 향유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만 알고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수작이다. 올해는 루미코 여사의 걸작 러브 코미디 <메종일각>도 서울미디어코믹스에서 신장판으로 재발행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스산하고 매서운 늦가을 날씨에 냉탕과 온탕 같은 루미코 여사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것은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특히 마음의 그림자를 마주해보고 싶은 용기 있는 분들과 함께 이 작품을 나누고 싶다.           


요니  플랫폼 저스툰에서 <소설小雪>이란 작품으로 웹툰 작가로 데뷔했고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인 사람. 무얼 하든 하루하루 충실하게 보내며 사는 게 목표.          



ⓒ2007 Rumiko TAKAHASHI / SHOGAKUKAN


위 글은 빅이슈 11월호 21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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