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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3. 2019

[스페셜] 올해의 영화 - 기생충

<기생충>의 한 해, 지하에 꿈틀대는 것들에 주목하라.


글 송경원     


2019년 한국영화는 곧, <기생충>

“<기생충>이 받을 줄 알았는데…” 올해 청룡영화상 시상 현장의 유행어는 <기생충>이었다. <기생충> 열풍은 아마도 청룡영화상에 그치지 않고 각종 시상식과 연말 결산 자리의 단골 메뉴가 될 것이다. 물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대중과 평단 양쪽의 지지를 받은 보기 드문 영화였다. 배급사의 의지와 힘을 실감한 케이스가 되긴 했지만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한국영화 최초의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마침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했던지라 <기생충>의 위업은 마치 한국영화 전체의 홍복인 양 널리널리 회자되고 있는 중이다. 어제까지 일면식도 없던 선배 영화인들은 한국영화의 끈질긴 저력이 오늘날의 봉준호를 만들었다고 상찬하고, 후배 영화인들은 제2의 봉준호를 꿈꾸며 각자의 각오를 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생충>은 하나의 신드롬을 거쳐 2010년대 한국영화를 거론할 때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일종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요컨대 2019년 한국영화는 <기생충>, 이 세 글자로 정리되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기생충>의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그늘

개별의 호불호를 떠나 <기생충>은 그만한 존재감을 보여준 영화다. 하지만 2019년을 뒤돌아보며 좀 더 눈길을 보내고 싶은 방향은 <기생충>이라는 거대한 이름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영화들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누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건 누군가는 가려진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반지하보다 더 아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처럼, 때론 잘 드러나지 못하는 쪽에서 상황의 본질을 마주하기도 한다. 약간의 과장과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위기였다. 사실 언론과 평단에서 부르짖는 한국영화 위기론은 때 되면 찾아오는 돌림노래처럼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동시에 여러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는 산업적으로 성장이 멈춘 적이 없다.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전체 관객 수도 둔화될지언정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볼 만한 영화가 있는가’라는 매우 주관적이고 질적인 잣대로 접근한다면 작년만큼 위태로웠던 적도 드물었던 것 같다. 여기서 ‘볼만한’의 기준은 단 하나, 감독이 기억이 나는 영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감독이 영화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색을 보여주는 영화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시장과 배급의 눈치를 보는 기획영화들이 고객의 눈에 잘 보이는 앞자리를 싹 쓸어간다. 그 결과 극장에는 영화가 넘쳐나지만 볼만한 영화는 줄어들어갔고, 독립영화 시장은 갈수록 쪼그라들어 어느새 1만 관객 동원이 목표가 되어버렸으며, 홍상수, 이창동 등 2000년대 초중반을 주름잡던 이른바 작가감독들도 서서히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게 딱 작년까지의 일이다. 사실 올해도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찬사와 안타까움 양쪽 모두의 심경으로, 이게 다 <기생충> 덕분이다. 한국영화 시스템의 체질이 2019년부터 단번에 개선되었는가. 극장에 갑자기 볼만한 ‘감독들의 영화’가 넘쳐나기 시작했는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기생충>의 개별적인 성공이 다른 모든 그림자를 가려주는, 편리하고 두려운 효과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영화인들이 바꾸는 세상

그 와중에 <기생충>만큼이나 화제가 된 독립영화 <벌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생충> 빼고 다른 영화가 모두 별로였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2019년 영화를 돌아보며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일은 독립영화의 약진이다. 물론 산업의 크기로는 여전히 미약하고 관객들의 관심과 수고로움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럼에도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중 상업영화가 여전히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나홍진에 매달리고 있을 때, 천만 영화가 줄줄이 나오면서도 이를 잇는 감독들의 이름이 좀처럼 거론되지 않고 있을 때, 규모는 작지만 알찬 영화들이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싹을 틔우고 있는 중이다. 올해 정식 개봉으로 관객들과 만난 <얼굴들>의 이강현 감독은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풀어나갈 줄 아는 귀한 감독이다. <벌새>의 김보라, <보희와 녹양>의 안주영, <아워 바디>의 한가람, <메기>의 이옥섭,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 등 여성 감독들의 약진도 빼놓을 수 없다. 굳이 앞에 ‘여성’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흥미롭고 주목해야 할 이름들이다. 이들의 영화가 특히 이채로운 건 선배 세대들의 유산이나 영향을 이어받지 않고 스스로 결과물과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영화 100년이라고 하지만 실은 한국영화사의 핵심 키워드는 다름 아닌 단절이다. 전쟁부터 독재의 검열까지 시대마다 시기마다 크고 작은 부침을 겪어온 한국영화는 100년의 시간 동안 빈번한 단절을 겪어왔다. 매 시기 위기론이 대두됐고 그때마다 이를 돌파해낸 건 선배 세대에게 빚지지 않은 젊은 영화인, 젊은 감독들의 에너지였다. 이들의 욕망은 명쾌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로서 자신이 보고 들은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하고 싶은 걸 한다. 이 단순한 명제가 모든 변화의 출발이다. 그 결과 1960년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지나 긴 검열의 암흑기를 버틴 후 9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가 밀어닥쳤고 빼어난 영화들이 관객들의 수준과 인식을 끌어올렸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도래로 극장 환경, 나아가 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지금, 다시금 답을 내어놓는 건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이다. 물론 이들이 답을 내겠다, 영화판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창한 야심으로 이 작업을 할 리는 없다. 그저 녹록지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고픈 작업을 하겠다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 그걸로 영화는, 그리고 세상은 바뀐다.      





목적보다 행위에 집중하는 영화들의 힘

그런 의미에서 올해 기억에 남는 작품은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다. 세간의 기준으로 이 영화는 실패한 영화다. 대중의 선택을 받지도 못했고 평단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닌지라 영특한 감독의 그저 그런 차기작 정도로 낙인찍히고 사라져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무모함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원본 없는 세계에서 음모론의 미로를 탐닉한다. 그 행보는 혼란스럽고 정돈되어 있지 않으며 거의 모든 순간이 과잉이지만 동시에 나는 이만큼 솔직한 영화를 한동안 보지 못했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무기력을 표출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계에서 음모론으로 대변되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주인공의 모습은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하고 있는 ‘행위’의 희열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세간의 평가나 무책임한 위기론과 무관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감독들은 언제나 존재했음을 <벌새>와 <얼굴들>로 대표되는 올해의 독립영화들을 통해 뒤늦게 발견한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2019년은 <기생충>이 아니라, 인식의 바깥에서 치열하게 매진했던 그들의 작업이 비로소 씨앗을 틔우기 시작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다만 이들과 만나려면 아직은 지하실로 걸어 내려가야 하는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부디 당신도 조금만 더 발품을 팔아 자신만의 ‘올해의 영화’을 발굴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송경원 <씨네21>기자, 영화 평론가. 좋은 글쓰기에 대해 늘 고민한다. 고양이 두 마리와 영화 평점에 까다로운 동거인과 함께 산다.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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