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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3. 2019

[스페셜] 올해의 배우 - 이정은

이정은이라는 미스터리


글 김소미     

 

*<기생충>, <눈이 부시게>, <동백꽃 필 무렵>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정은이라는 미스터리

2019년은 중년 여성 캐릭터의 호감과 가능성을 시험한 한 해였다. 조짐은 지난해부터 영화 <허스토리>, 드라마 <SKY 캐슬>과 같은 작품으로 조금씩 실체화되더니,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페미니즘의 화두가 한국 영화계를 노크한 올해엔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 서사와 캐릭터를 향한 관객의 소구력이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자들에게 시대정신으로 공유되고, “좋은 역할이 없다”고 입을 모아 기회의 부족을 말하는 배우들에게 판을 깔아주는 업계의 선순환. 김희애가 <윤희에게>로 첫 퀴어 멜로드라마에 도전하고, 이영애가 <나를 찾아줘>로 오랜 공백에 아랑곳 않고 스릴러 장르의 주연으로 돌아왔으며, 라미란이 <걸캅스>로 여성 중심의 코미디를 통해 첫 주연작을 알렸다. 





인고를 견뎌낸 생활 

연기자들의 활약 스크린 주연작 사례가 지각변동을 알리는 비교적 쉽고 명확한 케이스라면, 이보다 더 궁금하고 절절한 사례들도 있다. 이정은, 김선영, 염혜란으로 요약되는 생활 연기의 달인들이 좋은 예시다. 이들처럼 기다렸다는 듯 참아온 에너지를 터뜨리는 사람들에게 역할의 비중은 자주 논외다. 저마다 오랜 가난을, 단역 생활을, 연극 무대에서의 인고를 뚫고 날아온 이들은 올해 쉬지 않고 우리 주변의 초상을 연기하며 장면 장면을 낚아챘다. 그중에서도 배우 이정은은, 2019년 내내 부지런한 다작과 빠짐없는 환호를 이끌어내며 아직 시작일 뿐인 황금기를 예고한 배우다.     


새롭고도 압도적인 문광, 아니 이정은

지난 11월 21일, <기생충>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오랜 무명 활동의 스토리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배우 이정은. <기생충>에서 그녀가 연기한 문광은 작품 속 캐릭터의 궤적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집안 사정에는 도가 튼 부잣집 가사도우미인 그녀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쫓겨났다가 영화의 중반부쯤 갑자기 다시 등장한다. 딩동. 누군가와 함께 등장하거나 다른 이의 시점으로만 관찰되던 그녀가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그리고 가장 방심했던 순간에 홀로 나타나는 것이다. 비가 쏟아지는 저택 현관 앞에 검은 우비를 입고 선 여자. 더 이상 물러날 데 없이 애절하고 급한 문광의 상태는, 이미 영혼만 먼저 남편 근세가 있는 지하실로 날려 보낸 것 같은 표정 연기로 완성된다. 그 모습이 너무 기이한 나머지, 관객은  픽셀이 깨지는 작은 인터폰 화면만으로도 그녀가 이 영화에 도착한 저승사자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영화가 급회전을 시작하는 구간에 때맞춰 도착한, 장르의 안내자 문광 캐릭터에 새롭고 압도적인 배우를 기용하고 싶었을 감독의 바람이 만개하는 순간이다. 지하실 문을 열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벽에 붙어 있는 자태, 컴컴한 계단을 미친 사람처럼 단숨에 달음박질치는 움직임은 오랜 시간 연극 무대에서 기초를 쌓아온 이정은이 얼마나 몸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쓰는 배우인지를 증명하기도 한다. ‘당신 대체 누구세요?’라고 묻고 싶은, 섬뜩한 그녀의 기운은 올해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이중적인 고시원 주인아줌마 캐릭터로도 변주되었다.     


광기 어린, 그러나 무해한 엄마들

텔레비전 드라마의 쓰임새다운 누군가의 엄마를 연기할 때도 이정은은 호락호락한 법이 없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와 <동백꽃 필 무렵> 이야기다. 두 작품 모두에서 그녀는 얼마간 변주된 모성을 보여준다.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김혜자, 한지민)의 엄마를 연기한 이정은은, 인물의 진솔한 성격 너머로, 관객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있는 이중의 표현을 매 장면 성실히 던지고 있다. 눈 밝은 관객이라면 누구나 이정은의 얼굴에서 <눈이 부시게>를 감싸는 더욱 복잡한 감정의 층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무언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갸웃거릴 수 있었다. 

<동백꽃 필 무렵>의 경우 이보다 과격하다. 딸 동백 역의 배우 공효진과 열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정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로 극의 미스터리를 극대화해야 하는 엄마 정숙에 더없는 적역이었다. 자주 텅 비어 버리는 치매 환자인 동시에, 야생동물에 가까운 감각으로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동백의 주변 세계를 꿰뚫는 사람. 대단히 극적인 모순을 지닌 정숙 캐릭터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아우라였다. 평범하지만 어딘가 이상하고, 무해하지만 어딘가 광기 어린 탓에 보는 이를 내심 긴장하게 만드는 능력. 모든 연기와 캐릭터에 미스터리를 내재화하는 배우 이정은은, 그렇게 신파 담당인 모성애마저도 가장 재미있는 무엇으로 만든다.      





내공에서 우러나는 신스틸러

굳이 비유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많은 캐릭터를 <미성년>에서 주인공 대원(김윤석)을 곤란하게 하는 부둣가 만취 아주머니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다. 저 사람은 누군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저러는지, 그리고 어쩌면 이토록 강력한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선명한 스토리와 문맥이 있는 경우에서도 이 마력은 식지 않는다. 역할이 크든 작든, 관객의 시선을 훔쳐가는 재주가 있다는 것은, 인과론적으로 말하면, 그녀가 오랫동안 신스틸러가 되기 위해 갈고닦은 배우라는 말이 된다. 짧은 분량과 사연 속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한 방’을 찾아야 했던 시간들이 거기에 있다. 그 절박한 역사로부터 길어 올린 내공이 배우 이정은의 2019년을, 그 놀라운 흡입력과 존재감을 선물처럼 내밀었다.     


김소미 영화 주간지 <씨네21> 기자. 순간을 발견하고 더 정확히 쓰기위해 노력 중.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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