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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야생화 1 매실나무(1)

선비들 사랑앓이의 대상

by 한밭골샌님


"저 매화 화분에 물을 주거라!"


이 한마디로 이 세상 하직 인사를 대신하고, 앉은 자세로 돌아가신 분이 계십니다.

퇴계 이황 선생(1501~1570).


와병 중에는 자신의 추한 몰골과 냄새가 매화에게 결례가 된다며 방안의 화분을 치우라고 했습니다.


평생 매화를 소재로 107수의 시를 남겼고, 그중 91수를 묶어 <매화시첩>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단일 소재 시집을 펴내기도 했지요.


선생과 매화는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누구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현재 통용되는 1천 원권 지폐에까지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초상화와 함께 매화 스무 송이쯤이 도산서원 지붕 위로 두둥실~~ 보이시지요?


도산서원 곳곳에는 매화가 심어져 있다. 이 곳 매화를 도산매(陶山梅)라고도 부른다.


한국 유교의 태산이신 선생은 현대인의 심금까지도 울릴 애잔한 러브 스토리를 간직한 분이기도 합니다.


단양현감으로 재직하던 48세 때 만난 관청 소속의 18살 기생 두향과의 지고지순하고 절절한 사랑은 연극과 뮤지컬로 공연되기도 했어요.


30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는 그 사랑은 지음(知音), 오늘날 절친 이상의 우정이었습니다.


그들이 작별할 때, 두향이 드린 이별의 선물이 매화 한 그루가 심어진 화분이었지요.

두향 보듬 듯 평생 이 매화를 보살핀 선생은 생의 마지막 단계에도 정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고, 잘 보살피라는 유언으로 생을 마감했어요.


불길한 징조들을 통해 선생의 죽음을 직감한 두향은 단양에서 안동까지 혈혈단신 걸어갑니다.

신분의 차이로 먼발치에서 문상을 마치고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 바로 남한강 물에 투신해 선생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이승에서의 못다 한 사랑과 흠모를 하늘에까지 이어가요.


이들의 애틋한 사랑은 정비석의 <명기열전>, 최인호의 <유림>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요.

선생의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단양에서 두향을 위한 제사를 해마다 지낸답니다.

매실나무가 정식 명칭이다. 매화는 꽃을 강조할 때 부르는 이름. 우리 동네 수퍼 앞 매실나무는 동네 꽃 중 선두주자이다.


온갖 사연이 얽힌 매화.

식물도감에서의 정식 명칭은 매실나무입니다.

꽃을 위주로 부를 때 매화(梅花)인 거죠.


장미과의 갈잎 작은 키나무로 중국이 원산.

지금이야 열매 즉 매실의 효능 때문에 열광하지만, 옛 선비들의 매화 사랑은 이 꽃만이 지닌 그 고귀한 품격 때문이었습니다.


매화는 거의 모든 면에서 으뜸으로 치는데요.

조선시대 화가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의 '화목9품론'에서 소나무·대나무·연꽃과 함께 1품으로 분류했습니다.


피는 시기가 매우 빠르죠?

그래서 꽃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화괴(花魁) 또는 매형(梅兄)으로 불렸습니다.

혹한의 겨울,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강인한 모습이 선비의 지조를 상징한다고 보았지요.

앞서의 도산선생은 매화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며, 꼬박꼬박 '매형'이라 불렀다는군요.


중국인들은 매화에는 다음 네 가지의 귀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희소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번성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둘째, 나무의 늙은 모습을 귀하게 여기고, 연약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셋째, 마른 모습을 귀하게 여기고, 비만한 모습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넷째, 꽃봉오리를 귀하게 여기고,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매화 향기는 또 암향(暗香)이라고 특별히 구분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입니다.

하지만, 끝내 그 향기는 뼛골까지 스며든다고 하지요. 이런 식으로 향기를 맡는 행위를 일컬어 문향(聞香), 즉 '향기를 듣는다'라고 부릅니다.


조선 중기 때 문신인 신흠의 시 보시죠.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 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 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 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 우신지)

오동은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함없고,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도감에는 꽃 색깔에 따라 백매, 홍매 두 종류로만 구분할 뿐입니다.

꽃잎이 겹으로 피어 많을 경우 만첩(萬疊)을 앞에 붙이지요.


하지만 매화 사랑앓이를 하는 선비들이 이 두 종류로 만족했을까요?

그 생태에 따라, 모양에 따라, 사연에 따라 갖가지 이름을 붙였어요.


김명국의 <탐매도>. 한겨울 눈이 내릴 때 피는 설중매를 찾아 나선 선비와 하인을 그렸다.


동지 전에 피는 조매(早梅).

눈이 내릴 때 피는 설중매(雪中梅), 한매(寒梅), 동매(冬梅).

가지가 구부러진 데다 푸른 이끼가 끼고 비늘 같은 껍질이 생겨 파리하게 보이는 고매(古梅).

강변에서 자라는 강매(江梅).

녹색이 도는 꽃을 피우는 녹엽매(綠葉梅).

한 꼭지에 두 개의 열매가 열리는 원앙매(鴛鴦梅).

둥글고 작은 열매가 열리는 소매(消梅).

꽃이 모두 땅을 향해 핀다는 도심(倒心)ᆢ.


선비들이 매화를 감상하는 방법에 따른 이름도 있는데요.


땅에 심어 자연 상태의 모습을 즐기는 지매(地梅).

화분에 넣고 곁에 두는 분매(盆梅).

별도 공간에 놓고 감상하는 감매(龕梅).

밀랍으로 매화 모양을 만들어 즐기는 윤회매(輪廻梅).

얼음 속에 켜놓은 촛불의 빛으로 감상하는 빙등조매(氷燈照梅).


선비들의 매화놀이법 가운데 기상천외한 두 가지는 바로 윤회매(輪廻梅)와 빙등조매(氷燈照梅)입니다.


조선의 '간서치(看書癡, 책만 읽는 바보)' 중 한 분으로, 몇 년 전 그의 전기가 출판되기도 한 18세기 학자 이덕무.

그는 밀랍으로 매화를 만든 윤회매를 감상하곤 했다는데요.

꽃에서 꿀을 만들고, 꿀에서 나온 밀랍으로 꽃을 만드니 그게 바로 윤회인 거죠?

윤회매. 꽃의 꿀에서 나온 밀랍으로 꽃을 만든다 해서 윤회매로 불린다. 사진출처=의협신문


빙등조매는 한 술 더 뜹니다.

원래 매화는 황혼 무렵 뜨는 달빛에 감상하는 걸 으뜸으로 친답니다.

하지만 달이 없을 무렵 매화가 핀다면?


일단 마음이 맞는 지인들을 불러 서재에 모입니다.

추운 겨울밤, 물을 부은 백자사발을 밖에 내어 놓아요.

얼음 언 사발을 가져와 그 얼음을 파낸 뒤, 불 밝힌 초 하나를 가운데 세워요.

그 얼음을 뚫고 영롱한 빛을 쏟아내는 빙등 옆에 매화를 놓는답니다.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것 같은 매화를 지켜보며 밤새 시를 짓고 술을 마신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꽃의 으뜸인 매화이니만큼 차례에 나누어 소개해야겠어요.

오늘은 매화에 얽힌 이야기로 에둘러 살펴보았고요.

생태적인 설명과 또 다른 이야기들은 다음으로 넘기겠습니다.

To be continued!


202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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