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야생화들은 인간과 더불어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매 순간 절감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앞서 끈끈이대나물을 소개하면서, 정원 한쪽에 기세등등하게 꽃을 피우던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낫으로 베어지는 운명을 맞았다고 했었지요.
미운털이 박힌 것들은 꽃 필 때가 가장 위험해요. 그제서야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기도 하고, 씨앗이 생기기 전에 없애버려야 하겠다는 인간의 독한 마음이 가장 큰 이유이지요.
오늘 소개하는 '하늘타리' 역시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 만큼은 기구한 운명에 처한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재스민향에 물큰한 풀내음이 섞인, 독특하고 강렬한 향기로 저의 심야 귀갓길을 위로해 주던 이 꽃들이, 어느 날 무참히 잘려나가곤 했어요.
그런 수난을 겪으면서도 늦여름에 다시 꽃을 피워 한두 개 열매까지 맺을 만큼, 생명력은 눈부십니다. 이처럼 덩굴식물은 처음엔 사랑을 받다가 끝내는 내쳐지곤 하는데요. 옆에 있는 나무나 꽃을 감고 올라가 말려 죽이기까지 하니,미운털이 단단히 박히기때문입니다.
호박이나오이처럼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덩굴식물이라면적어도 소박을 맞지는 않을 텐데요. 하늘타리는 그렇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바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수그루가암그루보다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물을 '암수딴그루'라고 해요. 우리가 잘 아는 은행나무가 대표적인 암수딴그루.
한밤중에 꽃을 피우는 암수딴그루 하늘타리. 야행성 나방인 박각시가 짝짓기를 도와준다.
하늘타리. 이름도 꽃 모양새도 특이하죠? 오래지 않은 옛날엔 집집마다 울안에 심었답니다.뿌리와 열매, 씨앗이 갖고 있는 약효가 탁월해서랍니다. 한약방에 가져가면 돈을 주었다고도 하네요.
박목 박과 하늘타리속에 속하는 덩굴성 여러해살이풀. 어른 주먹만 한 열매가 작은 수박, 또는 참외 같아서 지역에 따라선 개수박, 쥐참외,하눌수박, 하늘수박이라 불렀답니다.
하늘에서 수박이 타고 내려오는 듯하다고 해서 하늘타리, 하눌타리. 하늘다래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요.
덩굴줄기가 하늘을 향해 다른 물체를 타고 올라간다고 해서 하늘타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는 학자들도 있답니다.
한자명은 과루등, 천선지루.
제주도에선 두레기, 하늘레기라 했는데요. 부엌이나 처마 밑에 열매를 매달아 두면 액운과 잡귀를 물리친다고 믿었대요.
꽃은 박꽃처럼 저녁에 피었다가 다음날 해가 뜨면서 시듭니다.
잎겨드랑이에 노란빛이 도는 흰색 꽃이 한 개씩 핍니다.납작한 종모양으로, 꽃잎이 5갈래로 갈라져요.
갈라진 꽃잎 가장자리가 다시 실처럼 갈라져산발한 할머니 머리를 연상시킵니다.
밤에는 실 모양의 꽃잎들이 쭉쭉 뻗어있지만, 동틀 무렵부터는 곱슬머리 모양으로 오므라듭니다.
머리카락, 또는 엉킨 실타래 같죠?
하늘타리 학명은 Trichosanthes kirilowii Maxim.
속명인 트리코산테스(trichosanthes)는 그리스어로 ‘머리카락’이란 뜻의 '트릭스(trix)'와 ‘꽃’이란 뜻의 안토스(anthos)의 합성어입니다. ‘머리카락 같은 꽃’.
열매는 오렌지빛으로 곱게 익는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잎은 가장자리가 5~7갈래로 깊게 갈라져요. 열매는 오렌지빛으로 곱게 익습니다. 수박이나 참외와는 딴판으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군요. 씨앗은 다갈색으로 익고요.
뿌리는 고구마처럼 생겼는데, 전분이 많이 들어있어 식용과 약용으로 쓴답니다. 몇 년 전 경남에서 20kg 정도의 초대형 뿌리를 캐내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하늘타리는 버릴 것이 없는 매우 유용한 자원 식물이래요.
새순은 나물로 먹고 뿌리로는 녹말을 만들어 식용했답니다.
한방에서는 하늘타리 열매를 괄루(括樓), 덩이뿌리를 괄루근(括樓根), 가루로 만든 것을 천화분(天花粉), 씨를 괄루인(括樓仁)이라 하여 모두 약재로 사용한다고 해요.
씨는 가래를 삭이고 기침을 멎게 하며 천식에도 사용하고, 뿌리는 열을 내리고 갈증을 없애고 종기 치료에 썼답니다.
중국 이름은 천과(天瓜), 오과(烏瓜), 과루(瓜蔞), 천원자(天圓子), 괄루자(栝蔞子), 천을근(天乙根), 천원을(天原乙), 천질월이(天叱月伊), 천질타리(天叱他里).
꽃말은 기쁜 소식,변치 않는 귀여움, 평범속의 비범, 성실,
■ 정원 주인이 잘라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잡초라고 일컫는 풀들 대부분은 뿌리에 생존의 비법이 숨겨져 있습니다. 생장점이 잎 끝이 아니라 뿌리 근처에 있기 때문인데요. 지상부는 아무리 잘리고 뜯겨 나가도 원상회복할 수 있는 힘이 뿌리에 있는 겁니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데다, 벌이나 나비가 일하지 않는 한밤중에 꽃을 피우는 저 하늘타리는 어떻게 짝을지을까요. 암꽃과 수꽃을 이어주는 사랑의 메신저는 야행성 곤충인 '박각시'랍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나방인 박각시 종류가 무려 50 종이 넘는군요!
우리동네표 하늘타리 수꽃. 밤새 꽃을 피우고, 아침부터 실타래가 오므라들기 시작한다. 각각의 꽃은 하룻밤만 핀다.
■■ "우리 주변에는 낮에 꽃잎을 닫고 밤에 꽃을 피우는 일명 '야행성 식물'도 있다. 달맞이꽃.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식물은 오후에 샛노란 꽃을 피운다. 우리에게 익숙한 박꽃도 늦은 오후 꽃을 피운다. 흰 꽃잎을 사방에 뻗는 형태의 덩굴식물, 하늘타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식물들은 왜 굳이 어두운 밤에 꽃을 피우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수분을 도울 곤충이 야행성이기 때문이다. 굳이 야행성 곤충의 도움을 받는 이유는 낮에 활동하는 곤충의 선택을 받는 경쟁에 참여하기보다 밤에 활동하는 곤충의 선택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따뜻한 봄과 여름이 아닌 굳이 추운 겨울 동안 꽃을 피우는 복수초와 설강화 같은 겨울꽃의 선택도 같은 이유다." - 이소영, <서울신문>
■■■어떤 이유와 인연에서든, 일단 자리를 잡으면 평생을 그 자리에서 붙박이로 살아야 하는 게 식물의 운명. 저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순응하지 않을까요?
환경이 아무리 척박하고 베어지거나 뽑히는 위험이 있다 해도, 그들은 묵묵히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유복한 환경에 뿌리내린 다른 식물들을 부러워할까요? 그러고만 있기엔 눈앞의 삶은 너무나도 엄정하고 치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