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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밭골샌님 Jun 25. 2024

골목길 야생화 45 능소화

이 더위에도 하늘 향해 꼿꼿이 일어서는 꽃


능소화(陵宵花, 凌霄花)


업신여길(능가할) 능, 밤(하늘) 소, 꽃 화.

이름만으로도 중국적인 느낌이죠?

그렇습니다.

원산지도 중국이고, 이름의 유래, 전설, 영어 이름, 약효 등등이 거의 모두 중국과 관련되어 있어요.


추위에 약한 탓에 예전에는 서울 경기 지역에선 구경하기조차 어려웠지만, 지구 온난화로 남한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답니다.


무엇이든 귀한 건 관심을 받게 되어 있지요.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국에서 들여온 것인 데다 서울 근처에서는 자라지 않았대요.

1930년대 문일평은 <화하만필>에서 덕흥대원군 사당의 능소화가 서울 안에 남은 유일한 것이라고 적고 있어요.


이 꽃은 어사화(御賜花)로도 쓰였어요.

어사화란, 조선시대 문무과(文武科)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下賜)한 꽃인데요. 실제로는 종이로 만든 꽃이랍니다.

'과거 급제자는 방방의(放傍儀:唱傍儀)를 거행할 때 홍패(紅牌) ·개(蓋)와 더불어 이것을 하사 받았다. 가는 참대[竹] 오리 둘을 푸른 종이로 감고 꼬아서 군데군데에 청 ·홍 ·황 3색의 가화(假花)를 달아, 한쪽 끝을 복두(幞頭) 뒤에 꽂고 한쪽 끝을 붉은 명주실로 잡아 매어, 머리 위로 휘어 넘겨서 입에 물고 3일 유가(游街:市街行進)를 하였다.'

- <두산백과>


급제자들은 나귀를 타고 3일 동안 장안을 도는 카퍼레이드, 아니 나귀퍼레이드를 했는데요.  이때 머리에 쓰는 관을 살구꽃, 접시꽃, 영춘화, 능소화 등을 본뜬 종이꽃으로 장식했다는군요.


자, 이 정도 만으로도 능소화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죠?


벽이나 다른 나무를 타고 10m 정도로 뻗어오른다.

생태 설명 시작합니다.


중국이 원산인 능소화과의 낙엽성 덩굴나무.
전체 덩굴 길이는 10m까지 뻗어 나요.
줄기에서 부착근(付着根) 혹은 흡착근(吸着根)나와 벽을 기어오르거나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갑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쟁이덩굴 잎을 헤치고 들여다보면, 이와 비슷한 뿌리가 담에 단단히 붙어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붙음뿌리는 공기뿌리라고도 부른답니다. 공기 중에 있는 습기를 빨아들여 가뭄에도 잘 견딘대요.

회갈색 나무껍질은 세로로 갈라지면서 잘 벗겨져 지저분해 보입니다.



줄기에서 나오는 부착근, 혹은 흡착근. 매끄러운 표면보다 울퉁불퉁한 곳에 더 단단히 붙는다.


잎은 마주나는 홀수 1회 깃꼴겹잎입니다. 아까시나무 잎처럼 생겼다는 뜻이에요. 잎이 마주나 전체적으로는 새의 깃처럼 생겼는데, 끝에 잎이 홀수로 남는 모양.

작은 잎은 7개 혹은 9개.

나팔꽃처럼 깔때기 비슷한 종 모양의 꽃이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합니다. 가지 끝에 옆을 보며 10개 안팎이 달려요. 마주 보는 한 쌍의 꽃이 엇갈려 십자 모양을 이루지요. 지름은 6~8cm로, 주먹만 해요.
다섯 갈래로 벌어지기는 했지만, 전체가 붙어있는 통꽃입니다.

겉은 연주, 안쪽 앞진주홍, 속은 연주홍.

한 개의 암술과 네 개의 수술이 있는데, 수술은 끝이 구부러져 있습니다.

학명인 캄프시스 그랜디플로라(Campsis grandiflora)의 속명인 캄프시스는 그리스어로 '굽는다'는 뜻이래요.

수술이 굽었기 때문이거나, 꽃자루가 하늘 향해 굽었다는 뜻일 수도 있겠어요.



다섯 갈래로 벌어져  있지만, 꽃잎이 붙어 있는 통꽃이다. 암술 한개에 수술 네개. 수술의  끝이 구부러져 있다.

절이나 사당에 가면 많이 볼 수 있고요. 관상용으로 사랑받습니다. 꽃은 말려서 약용으로 썼대요.


금등화(金藤花), 과거 급제한 사람에게 내렸다고 해서 어사화(御賜花), 양반들만 심었다고 해서 양반꽃이라고도 불렀군요.
상민이 심으면 양반 능멸죄로 곤장을 쳤다고도 해요.


동백꽃처럼, 신선한 상태의 꽃이 통째로 깔끔하게 떨어져 바닥을 다시 꽃밭으로 만들어요.

이렇게 지는 모습조차 양반의 기품을 닮았다고 여겼다는데요.

원래 통꽃은 통으로 떨어지거나 시들고, 벚꽃 같은 갈래꽃은 갈래갈래 흩날리지요.

9월에 씨앗이 여무는데요. 네모지며, 두 개로 갈라져요.

하지만 대부분이 씨앗을 맺지 못해 꺾꽂이로 번식시킨답니다.

유난히 붉고 뾰족하며, 씨앗을 맺는 능소화는  미국능소화랍니다.


능소화 꽃을 말려서 여성 관련 질환인 무월경, 월경불순, 산후출혈, 대하증에 활용했대요.

영어로는 Chinese trumpet creeper.

중국나팔덩굴식물.
꽃말은 기다림, 명예, 영광.


이 꽃을 '구중궁궐의 꽃‘ 이라고도 한다는데요. 얽힌 전설은 이래요.

중국 황제의 궁궐에 소화(宵花)라는 궁녀가 있었어요. 하룻밤 황제의 승은(承恩)을 입어 빈으로 승격되죠. 그러나 그 이후로 황제는 소화빈의 처소에 들르지 않아요. 상사병에 걸린 소화빈. ‘담장 옆에 묻혀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는 쓸쓸히 죽어갔대요. 거기서 피어난 꽃이 소화를 능가해 능소화라 불렀답니다.


담장너머로 발돋움해 임이 오시는지, 혹은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살펴보는 듯, 혹 발소리라도 들릴까 기울이는 , 그렇게 피어 있는 능소화.

화려함 뒤엔 언제나라고 할 만큼 아픈 사연이 숨겨져 있나 봐요.


통꽃이므로 통으로 떨어진다. 능소화 감상 포인트는 동백꽃처럼 떨어진 바닥도 보아야 한다고 전해진다.

한자 표기가 통일돼 있지 않아 헷갈리는데요. 업신여길 능, 하늘 소를 쓰기도 합니다.

16세기 명나라 학자로 <본초강목>을 지은 이시진은 능소화가 나무에 붙어 높이가 수 장(丈, 1장은 3m)에 이른다고 해서 능소(凌霄)라 한다고 기록했어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높이 자란다는 뜻이겠지요.


능소화가 감고 올라간 나무는 햇빛을 못 받아 결국은 죽는답니다. 그만큼 능소화 잎이 크고 무성해요.

능소화에 감긴 나무의 모양 그대로 수백 송이 능소화 꽃이 피면 그 또한 장관이라고 해서 좋아한다니, 애먼 나무는 얼마나 억울할까 싶기도 합니다.



능소화의 회갈색 나무껍질은 세로로 잘 벗겨져  지저분해 보인다.


능소화는 어린이나 노약자가 있는 집 안에선 기르면 안 된다고 전해져 왔답니다.
꽃을 잘못 만졌다가 눈을 비비면 눈이 먼다고 했어요. 꽃가루가 갈고리처럼 생겨서라는 그럴듯한 이유와 함께요.

그게 낭설이고,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설명 들어보시죠.


"그런데 한동안 능소화 피는 계절이면 반복적인 민원으로 고생을 했었다. 일본 기록에 능소화 꽃가루에 갈고리 같은 구조가 있어서 사람들을 실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였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란 이의 책에 ‘어떤 사람이 능소화를 쳐다보다가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이 눈에 들어가서 실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능소화 꽃가루가 위험하다’에서 나아가 여러 구체적 병명이 등장하게 만들었고, 어린이집이나 공원 등에서는 잘 키우던 나무들을 뽑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에서 실험연구를 해보았다. 능소화의 꽃가루를 전자현미경(SEM)으로 관찰한 결과 표면이 가시 또는 갈고리 형태가 아닌 매끈한 그물망 모양을 하고 있어 바람에 날리기 어려운 조건이고, 사람의 눈에 들어갈 확률이 낮으며, 들어간다 하더라도 피부나 망막을 손상시키는 구조가 아니었다. 또 식물체에는 독성이 거의 없고, 화밀(꿀)은 48시간 장시간 처리한 경우에만 일부 세포독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부러 오래된 꿀을 어렵게 모아 먹거나 아주 장시간 피부에 노출하기 전에는 우연히 실명에 이를 염려는 없는 것이다."

- 이유미, <경향신문>, 2017. 9. 4


꽃이 유난히 붉고 아랫부분이 뾰족한 미국능소화는 열매를 잘 맺는다.


이해인 수녀님이 능소화를 노래한 시, 감상해 보세요.

<능소화 연가>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나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 능소화 역시 다른 꽃들처럼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이겠지요?

경건함, 높은 지위, 관능미로 해석한 분들의 글을 소개합니다.


"능소화의 아름다움은 ‘스스로 힘쓰면서 쉬지않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의  태도 덕분이다.

그런데 자강불식은 하늘의 속성이다. 그래서 능소화는 자강불식하는 하늘을 닮고서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하늘을 가질 수 있다. 자신만의 하늘을 가진다는 것은 곧 자존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자존은 모든 존재의 정체성이지만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주 많다."

- 강판권, <동아일보>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능소화가 최참판 댁의 상징으로 나옵니.

“환이 눈앞에 별안간 능소화 꽃이 떠오른다. 능소화가 피어 있는 최참판 댁 담장이 떠오른다”는 대목이 있다.

- 김민철,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그 무렵 그(영빈)는 곧잘 능소화를 타고 이층집 베란다로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창문은 검고 깊은 심연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심연에 다다르지 못했다.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 김민철, 앞의 책에서 재인용


■■■ 참으로 많은 분들이 능소화에 대해 주옥같은  이야기를 풀어놓아서, 그것을 추스려 담느라 정신없는 한 주일을 보냈습니다.


담장너머로 피어 있는 능소화는 예나 지금이나 무심하기만 한데, 그들과 단 한마디도 주고받을 수 없는 우리는 왜 이리 주저리주저리 수다스러운지ᆢ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냥, 뜨거운 여름 한나절임에도 하늘 향해 솟아 오르주황색 꽃이 있는데,

그게 이름하여  능소화라네~~.


이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 될 듯합니다.


2024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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