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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옹이 Jan 28. 2019

당해봐야

당했다. 아들에게.

‘씀’이라는 어플을 쓰고 있다. 하루에 두 번씩 글감을 던져주면 자유롭게 해당 글감과 관련한 글을 쓰는 어플이다. 부지런하게 쓰지는 않지만 글을 통해 나의 삶을 반추할 수 있어서 일기 쓴다는 생각으로 가끔 글을 쓰곤 한다.


오늘의 글감이 ‘기다리는’과 ‘당해봐야’다. ‘기다리는’으로는 늘 나를 기다리게 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적었다면 ‘당해봐야’는 그래서 그런 내가 누구에게 당한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이제 세 돌이 되어 가는 큰 아들은 기저귀를 떼는 훈련 중이다. 억지로 떼게 하지는 않았고 자연스럽게 아이의 흐름에 맞춰주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거 같다. 떼쓰고 우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바지에 싼 한 번을 빼놓고서는 모두 변기에 소변을 누는 데 성공했다.

소변에 이어 대변은 조금 난이도가 필요했는데, 오늘 드디어 대변이 마렵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우리는 재빨리 준비해 놓은 보조 변기에 아이를 앉히고 영광스러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보지마, 나가.”

라고 똑똑하게 아이가 말했다. 세 돌도 되지 않았지만 부끄러움이 생기고 자신의 영역이 시작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늘 무언가를 해주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행동에 옮겨온 지난 3년이었는데 어느 순간 아이의 시간과 공간을 기다려줘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많이 자란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아이와 나 사이에 뭔가 벽이 생긴 거 같은 아아아아주 작은 섭함이 올라오려다 말았다. 아니다 섭했다. 쳇.

그래. 사람은 당해봐야 아는 법이다. 지난 주 인감증명서를 난데없이 떼 오라는 어머니 말씀에 그런 건 제발 점심 시간 전에 말해 달라고 퉁명스럽게 날린 쫑크가 생각났다. 단순 자신의 배변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싶은 3살 아이의 밀어내기와 알량한 나의 쫑크 사이에는 얼마나 켜켜이 쌓인 그 섭함들이 있었을까.

아무튼 이진오 첫 배변 성공 축하해. 그리고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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