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늘 기대감에 들뜬 채 동네 서점에서 새 공책을 사고, 온 가족이 작은 방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새책 냄새 가득한 신학기 교과서를 두꺼운 달력 뒷면으로 곱게 감싼 후 검정 유성 매직펜으로 이름 석자를 적고, 이빨 숭숭 빠진 단날 칼로 새 연필을 애지중지 깎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것을 실감한다.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연필이 짧아지면, 다 써버린 볼펜심만 버린 채 책상 서랍 한켠에 모아 두었던, 모나미 볼펜대를 끝에 끼워 한참을 더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그 시절.
풍족은 몰랐지만 마음만은 늘 풍성했던 그때를 이야기하면 이제는 '꼰대'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오늘은 그때 그 시절, 태권 V가 그려진, 도시락만큼 컸던 필통에 들어 있던 '연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단히 마음먹고 글씨체를 바꾸기 위해 연습을 시작할 때면, 처음으로 맞닫는 질문은 바로 '필기구'에 관한 것이다.
어떤 필기구로 연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학교, 직장 어디서나 가장 많이 사용하는 볼펜일까? 뚜껑만 잘 덮으면 제법 오래 쓸 수 있는 싸인펜일까? 무한리필되는 듯한 샤프일까? 붓글씨를 흉내 내기에 적당한 붓펜일까? 왠지 잡기만 해도 잘 쓸 것만 같은 최고급 만년필일까?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계속 생산하고 소비해야만 유지되는 자본주의의 한 복판을 지나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글씨 연습에 쓰일 펜하나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게 느껴진다. 앞 질문의 답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고자 제법 오랫동안 다양한 펜을 사용해 글씨를 바꾸어온 나의 경험과 의견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꼭 '연필'을 사용하라고 이야기한다. 본인의 기호나 직업에 따라 볼펜이나 싸인펜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가장 자주 사용하는 펜으로 연습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나(이유; 늘 곁에 두고 써야 하므로), 기왕 글씨체를 싹 바꾸고자 하는 분이라면,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할 겸, 연필로 연습하기를 추천한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면 아래 나열된 '연필로 글씨 연습을 권하는 이유' 몇 가지를 꼭 읽어보자.
1. 마찰력
'연필'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 이유는 '마찰력'이다. 연필은 흑연과 점토의 혼합물로 만들어진 연필심과 종이의 마찰에 의해 써지는 방식인데, 굴러가는 둥근 볼 사이로 기름 잉크가 흘러내리며 써지는 볼펜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이다. 흑연 특유의 '거침'은 쓰는 동안 적당한 마찰력을 일으켜 미끄럽거나 뻑뻑하지 않은데, 이는 내가 '글씨를 잘 쓰기 위한 준비 3가지' 에서 두 번째로 언급한 '속도'와 결을 같이 한다. 이 '마찰력' 덕분에 연필은 천천히 쓰는 연습 방법에 효과적이며 손끝의 미묘한 힘 조절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최상의 도구이다. 마찰력의 크기는 연필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므로 본인의 기준에 부합하는 연필을 찾길 바란다.
위 그림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연필의 종류를 글씨의 굵기와 농도에 따라 순서대로 배열한 것인데, 마찰력은 굵게 써지는 것과 반비례한다.
즉, 'H'는 딱딱하다: Hard의 머리글에서 온 것이기에 'H'앞의 숫자가 커질수록 경도가 증가해 마찰력도 커지는 것이다. 한편, 'B'는 검다: Black의 첫 번째 알파벳인데, 'B'앞의 숫자가 커질수록 진하게 써진다고 이해하면 된다.
필자는 항상 '2B'나 'HB'를 초보자에게 권하는데, 개인의 취향(속도, 굵기, 진하기)에 따라 결정하기 바란다.
2. 단면
바로 전에 쓴 글 '펜 잡는 방법'을 설명할 때, 필자는 '연필'을 사용하면서 예를 들었다. 그 내용과 같이 우리 대부분은 엄지와 검지로 잡고 중지로 받치는 형태로 펜을 잡는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 손가락 역할이 아주 큰 것이다. '연필'이 단연코 이 방법에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대부분의 연필은 그 단면이 육각형인데, 연필을 잡으면 위에서 언급한 세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으로 여섯 면 중 세 개의 면을 차지한다. 이는 손가락의 일정한 간격 유지와 고른 힘 배분을 가능하게 한다. 가끔 삼각형 단면의 연필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잡아 보면, 육각 연필과 그 쓰임새가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금방 안다.
처음이나 다시 글씨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싸인펜이나 볼펜과 같이 둥근 단면을 가진 펜보다는 육각, 삼각 단면을 가진 연필을 사용하도록 하자.
3. 지우기
글씨도 하나의 훈련으로 생각하고 연습에 임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제대로 알고, 자주 연습하며, 고쳐 나가는 과정의 반복인 것이다.
이 고치는 과정에서 '연필'은 좋은 수단이 된다. 모두 알다시피, 지우개만 있으면 연필은 쉽게 지울 수 있다. 맞춤법이 틀린 경우, 즉시 지우고 고쳐 써, 반복되는 실수를 줄임으로써 글씨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편안 마음으로 그 과정에 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글씨를 쓴 경우, 바로 지운 뒤 그 위에 바로 다시 포개어 써, 원하는 글씨를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완전히 지우지 않고 흔적을 어느 정도 남겨둔 채 쓰기를 반복하면 전과 후의 비교도 가능해서 글씨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4. 감성
글씨를 하나의 훈련으로만 생각한다면 고행으로 느낄 수 있어 꾸준한 연습을 하기 어렵다. '노력'이라는 접근보다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접근이 훨씬 더 도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 '즐거움'을 쉽게 찾을 수 있는 필기구가 바로 '연필'이다.
필자는 연필로 글씨를 쓰기 전에 반드시 칼로 연필을 깎는다. 나무와 연필심을 칼날로 밀어내면서 알맞은 모양을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선물한다.
또한 밝은 주광색 조명 아래에서 검회색 연필의 흔적을 눈으로 따라가는 것도 상당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동시에, 흑연과 종이의 갈등이 만들어 내는, 사각사각거리는 비명은 나의 고막을 시원하게 긁어 준다.
이렇게 연필은 우리의 잃어버린 감성을 되찾아 준다.
5. 진도
'연필'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쓸수록 길이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필자의 첫 번째 필사 방송(혜민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는 세 자루의 연필을 사용했다.
중간에 연필을 두 번이나 새것으로 바꾼 셈인데, 나의 글씨로 가득 채워진 노트를 보면 성취감을 느끼듯, 점점 줄어드는 연필의 길이와 늘어나는 몽당연필의 개수를 보면 진도를 확인할 수 있고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추진력이 생긴다.
위에서 언급한 5가지 이외에 더 많은 장점들이 있지만, 내가 그토록 연필을 자주 사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원천의 이유는 바로 '연필'로 쓸 때 내 글씨가 가장 멋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