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의자

by 대사랑 biglovetv

햇빛 좋은 날이면, 거실 창밖으로 목을 길게 빼야만 보이는 조그마한 남쪽 바다 위로 황금색 가루들이 뭉터기로 뿌려지고 있다. 그 위로 이제는 공짜 통행을 해도 될 듯한 광안대교가 마치 먹물 가득 품은 큰 붓이 화선지 위로 날카롭게 지나가듯 뚜렷한 경계선을 그리고 있다. 장엄한 자연과 미천한 인공 구조물이 조화롭다.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진다. 바다가 나를 부른다. 시원한 바다 바람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난다. 이사 오길 잘했다. 30분이면 간다. 흙 묻은 신발 끈을 털듯이 다시 묶고 씩씩하게 현관을 나선다.

한적한 도로와 전통 시장 골목, 방파제 길을 총총걸음으로 가로지르면, 회색빛 바나나를 세로로 자른듯한 모양의 마천루들과 수평선을 테두리 치는 광안대교가 병풍처럼 배경을 하고 있는 도시 바다 뷰가 내 앞에 펼쳐진다. 해변가 초입에는 낚싯대로 시간을 낚고 있는 할아버지들이 막걸리와 김밥의 조합으로 브런치를 즐기고 있고, 서울 사투리를 쓰는 여자 꼬마 아이는 바다와 처음 만났는지, 계속 손 내미는 파도와 자신의 고사리 발로 즐거운 인사를 반복한다.


파도가 부서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경계선을 따라 발도장을 찍다 보면, 잠시 후, 한적한 시골 논두렁길 위를 달리는 빨간색 스포츠카처럼 생뚱맞은 장면이 나온다. 더없이 넓은 하얀 모래밭 위에 앤티크 한 책상과 의자가 외롭게 자리하고 있다. 지난밤 몰래 누가 버리고 간 것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낡은 가구들이 바다를 감시하듯 당당하게 앉아 있다. 탐났다. 보물 찾기에서 1등이라도 찾은 양 신났다.


여기는 곧 나만의 '창작의 의자'가 되었다.

지난날, 어느 TV 방송의 육아 프로그램에 나왔던 '반성의 의자'가 생각났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 아이는 거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반성의 의자'로 향해야 한다. 반성이 끝날 때까지 이 의자를 지켜야 하는 벌이 주어진다. 믿기 어려웠지만, 전문가라고 나온 중년의 여인은 효과 좋은 방법이라고 극찬을 했다. 과연 그럴까?

이런 기억과 호기심으로 나만의 '창작의 의자'가 태어난 것이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이 의자에 앉아 하나의 글쓰기가 끝날 때까지 일어서지 않겠다는 오기 섞인 다짐이 발동했다. 부쩍 글쓰기가 좋아진 요즘..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효과는 정말 좋았다. 역시 전문가의 말은 달랐다.


산책코스의 반환지점인 광안리 해변가 노란색 간판을 달고 있는 커피점에서 1500원짜리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뽑아 들고, 즐거운 고통의 장소인 '창작의 의자'로 향한다. 커피가 적당한 온도로 식을 때 즈음 의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다. 빨리 달려가고 싶어 진다. 곧, 커피 향은 낡은 책상 위를 차분히 덮고 나만의 창작의 시간은 시작된다. 뷰가 끝내준다. 게다가 공짜다. 신대륙의 발견이다.

글쓰기는 자연과 자신을 잇는 대화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인지, 문장이 잘 만들어진다. 해풍에 더 말랑해진 뇌와 명문장을 품었던 심장이 글쓰기를 돕는다. 목표를 정하면 과정이 빨라진다. 거침이 없다. 점심을 제때 먹으려면 곧 일어서야 한다. 낮은 궤적의 겨울 해는 파라솔 그림자를 조금씩 동그랗게 만들고 있고, 나의 손가락은 점점 더 빨라진다.


돌아오는 길은 나의 두 발과 두뇌가 바쁘다. 모래 가득 묻은 신발은 제법 빨라진 걸음에 점점 깨끗해지고, 머리는 조금 전 썼던 글을 이세돌처럼 빠르게 복기한다. 온기를 살짝 품은 시원한 바람은 더 좋은 문장을 나에게 데려다주고 이마의 구슬땀은 데려간다. 이렇게 나의 오전은 풍요롭게 마무리되어 간다. 마치 방학 숙제를 빨리 끝낸 듯 대견함이 덩달아 생긴다.


자주 가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자. 자신만의 소중한 장소를 찾아보자.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자. 그리고, 이름을 붙여 주자.

삶의 부피는 늘어나고 그중 한 부분이 꽉 찬다.

나를 움직이게 한다.


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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