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칭찬해줘, 잘 했다고 해줘

by 지망생 성실장

지난 일요일, 아이들 옷을 사러 아울렛에 갔다. 어느새 훌쩍 큰 아이는 유아동 쥬니어 7층이 아니라, 성인 스포츠 캐쥬얼 6층에서 옷을 사겠다고 했다.


키가 안 크면 어쩌나. 없는 돈을 긁어모아 보약을 먹이고, 대학병원에 키 성장 검사도 하러 가는 등 난리 부르스를 쓴 결과, 초등학교 6학년인데 150 센티가 넘었다.

사실 나는 성에 차지는 않지만, 의사 선생님 말대로, 성인여자 "정상 키" 이기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니, 매우 마음에 든다. 그리고 아직 1-2년은 더 클 수 있는 희망도 있고.


암튼, 그렇게 큰애를 따라 성인 옷 가게에 들어가서 옷을 고르게 했다. 나는 뭐 빨게벗고 다니는 것이 아닌 이상 의복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둘째랑 가게 의자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었다. 근데 옷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넉넉한 오버핏의 남방이었다. 연한 보라색에 혼란스러울 정도로 그래피티 같은 낙서 같은 글자들이 프린트 되어 있는 남방이었다.


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 남방을 집어들고 입어봤다. 일단 천이 톡톡하니 여름에 반팔 위에 겹쳐 입기에도 좋아보였다. 넉넉한 사이즈도 맘에 들었고, 칙칙하지 않고, 발랄하고 화사해보여서 좋았다.


나는 금액도 물어보지 않고, 옷을 구매했다.


아이들이 기겁을 하면서, "그거를 사게?" 라고 말을 했지만. 나는 "엄마 10년만에 사는 옷인까 무조건 예쁘다고 해줘."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애들이 예쁘다고 말해줬다.


뒤늦게 합류한 남편에게 옷을 샀다고 했다. 남편이 글자 있는 옷이냐고 물어봤다.

- 남편은 글자가 써 있는 옷을 절대 안 입는다. 브랜드 이름이 적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림이나 글자등 스트라이프 무늬까지 다 싫어한다. 사실 브런치에 쓴 적이 있는데, 작년인가.. 아울렛에가서 폴로 옷을 큰 맘먹고 쇼핑하려고 했었는데. 내가 잡은 재킷에 크게 "P" 라고 자수가 있다고, 그런 것을 고르냐고 바로 한 마디 했었다. 나는 그때 너무 화가나서, 내가 10년만에 집은 옷을 그렇게 쿠사리를 주냐? 그냥 예쁘다고 하면 안돼냐? 나는 글씨가 써있어도. 그림이 있어도 좋다. 그게 왜 촌스럽냐? 왜? 나는 아울렛에서 폴로도 못 사입냐? 나 너랑 결혼전에는 폴로, 타임, 마임 아니면 안 입었다. 내가 쭈그리라 옷 못 사겠다. 하면서 아울렛에서 소리지르고 화낸 적이 있었다.-


나는 "엄청난 글자가 써 있는 옷이야. 하지만 무조건 입을 거고, 나는 마음에 드니까 잘했다고해. 예쁘다고 해. 무조건 좋다고 해!" 라고 말했다.


남편이 잘 했다고 말했다.


****


아직, 옷은 입지 못했다. 새옷이라 아깝기도 하고, 옷만 입고 나가고 싶은데, 아직은 잠바나 코트를 입어야 하는 날씨이기에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환불 생각은 1도 안난다. 기분이 좋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의견을 묻지 않고, 도전하고 돈을 지불했다는 것에 감사했다. 7만원이 넘는 남방 하나... 나에게는 너무나 비싼 것이기에 아마 한달을 고민하다가 못 샀을 것인데. 저지르니 이렇게 속이 후련한지...


그리고 온 가족이 눈치를 채고, 잘 했다고 해주니, 좀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 같다.


이 기분을 몰아.. 필라테스를 결제했다.


사실 이전에 운동을 하고 싶은데 돈이 아깝다고 포스팅을 했는데. 정말 돈 안 쓰니, 시간도 안 쓰게 되고 안하게 되더라. 그런데 눈도 침침하고, 잠을 자도 충전이 안돼고, 이러다 정말 노화로 일찍 죽겠다 싶었다.

( 우리 딸이 애기 낳으면 봐줘야 하는데... 그때까지는 건강해야 하는데... )


남편이랑 맨날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안하는 것도 한심하고...

에라 모르겠다. 카드값 못내면 누군가가 내주겠지 하는 심정으로 집 앞에 필라테스에 전화를 했는데. 마침 10만원 할인 기간이라고 까지 해서, 그냥 등록을 해버렸다.


그리고 이 소식을 남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70만원 가까이 하는 돈이 나가는데... 싶어서 눈치를 봤는데. 남편이 잘 했다면서. "사실 1년 가까이 용돈을 모았는데, 그 돈 줄께. 운동 편하게 해" 라고 말을 해줬다.

작년에 정신과 다니면서 돈돈돈!! 해서 50만원인가 받았었는데


그 이후로 아마 돈을 좀 모았나보다. 진심으로 너무 고맙고, 좋았다.


그리고, 친정 언니한테 말하니까, 언니도 잘 했다고 해주고, 친정 엄마는 돈을 주면서, 운동복을 사라고 해줬다.



***


사실 비싼 운동을 결제하면서 단 한명이라도 "그렇게 돈 들여봤자 뭐하니, 돈만 쓰고 안 할거, 여태 한두번이 아니잖니, 돈만 쓰고 안한 경우 많았잖니, 돈 없다고 그렇게 퉁퉁 거리더니, 돈이 있었던거니? 장사가 힘들다는 말이 엄살이었구나?" 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한 명도 "무조건 잘 했다고" 말해줘서 사실 너무 의아하고, 감동이다.


그리고, 오늘 위아래 쫙 붙는 필라테스 옷을 사면서 사진을 보냈다. 나는 163 센티에 75킬로인 뚱뚱이인데. 완전 다이어트 비포 사진의 뱃살을 가진 사람인데,

남편이 누구에게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농담으로 "앗! 내 눈" 하고 말했어도 웃었을 것인데

바로 "이쁘다" 라고 말해줬다.


심지어 언니도 같은 사진을 보고 "예쁘다. 화사하다 잘샀다" 라고 말해줬다.


아... 눈물이 난다.


이렇게 칭찬이 좋다니.


***


다음주부터 주 2회 필라테스가 시작된다. 3개월이다. 나는 이것은 어떻게든 꼭 챙겨 다닐 것이다.


온 가족이 응원을 해주다니..

내 정신병이 나아질 것 같고, 기분이 매우 좋다.


***


운동하나 시작했다고, 시작한 것 만으로도 지지해주는 가족이었구나. 미안하고 고맙다.


내가 운동을 하는 시간에, 1-2번은 큰애 학원이랑 시간이 겹쳐서, 둘째가 1시간 정도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심지어 저녁 시간이다. 그런데 둘째가 괜찮다고 했다. 정말 혼자 있을 수 있냐고 몇번이고 확인을 했는데. 하겠다고 한다.

물론, 그 시간에 넷플릭스 보거나. 몰래 사탕을 먹으려는 속셈이겠지만...

이제야!!! 진짜 애들만 두고 나가도 죄책감 없이 지낼 수 있는, 진짜 애들이 컸구나 싶다.

도비는 자유다 라는 것 처럼..

집 앞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시간도 힘도 없어서 냉동실에 쓰레기를 모아두었던 13년 전을 생각하면

지금 나는 많이 자유가 되었다.

엄마가 운동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게, 이제 혼자 있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두 딸들이 정말 고맙다.


이제 하나씩 도장깨기를 해보겠다.

세상은 안 바뀌겠지만.

내 속은 바뀔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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