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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방랑객 Feb 14. 2020

내려야 보이는 곡선 구간의 묘미

나가사키본선(長崎本線) 첫 번째 이야기

  세계 2차 대전의 종자부를 찍을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도시는 단연 히로시마다. 그런데 히로시마와 거의 같은 급으로 많이 회자되는 도시가 있다. 바로 나가사키다. 물론 요즘은 짬뽕으로 더 유명해진 감이 없지 않다. 이렇게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나가사키. 이곳으로 가는 보통열차는 기다림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잠시 간다 싶지만 멈추고, 또다시 가나 싶지만 또 멈추고. 이렇게 반복된 멈춤과 나아감을 거치기에 열차는 그렇게 긴 거리가 아님에도 운행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나가고 싶어 하는 보통열차와 그것을 가로막는 특급열차들. 어쩌면 보통열차는 생각하는 대로 바로바로 되지 않는 평범한 우리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특급열차는 그렇게 무심하게 보통열차를 멈추게 하고, 기다리던 자신(보통열차)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목적지만을 향해 나아가버린다. 그 모습을 보면 상대적인 박탈감도 느낄 법하지만 보통열차는 꿋꿋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더욱 천천히 나아간다.

  규슈 중심도시인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를 잇는 철도를 나가사키본선이라고 한다. 물론 정확하게는 사가현 철도 중심역인 도스역에서 시작하는 노선이지만, 특급열차는 모두 하카타역까지 연장해서 운행하기에 후쿠오카와 나가사키를 잇는 철도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나가사키본선은 본선이라는 이름과 달리 대부분의 구간에서 단선으로 이어지는데, 복선으로 이어지는 구간도 사세보선으로 가는 열차가 있는 도스역에서 히젠야마구치역까지의 구간에 한하며 그 외의 구간은 거의 단선 구간으로 이어진다.

  이 나가사키본선의 단선 구간은 특급열차를 탈 때와 보통열차를 탈 때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시간이 중요한 특급열차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 보통열차가 희생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급열차를 타면 이 구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나가사키본선의 위치.


  도스역에서 시작된 나가사키본선은 히젠야마구치역까지 복선 구간으로 반대편 열차의 통행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으며 운행하고 있다. 하지만 단선 구간이 시작되는 히젠야마구치역부터는 말이 달라진다. 한 열차가 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열차는 멈춰 있어야 하는 상황. 그 멈춤의 대상은 모두 보통열차의 몫이다.


나가사키본선의 보통열차. 2량 편성의 짧은 열차다.


  나가사키본선의 보통열차. 워낙 다양한 노선이 얽혀있다 보니 전 구간을 운행하는 보통열차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신 구간구간을 나눠서 운행하는 열차 빈도가 더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열차들은 상대적으로 짧은 구간을 운행하지만 소요시간은 하카타를 오가는 특급열차와 견주어봐도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달린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에서 정차하는 동안 통과하는 특급열차.


  역에 정차하고 있을 동안 특급열차를 보내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장면. 보통열차의 기다림에 대답하기는커녕 무심하게 지나가버리는 특급열차. 그래도 보통열차는 마음을 다시 잡고 가던 길을 다시 나아가기 시작한다.


뒤따라오는 열차를 통과시키는 일도 있다.


  단선 철도에서 마주오는 열차를 기다리는 것은 숙명이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열차를 통과시키기 위해서 정차하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이는 열차 등급이 다를 때만 가능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도 볼 수 있는 나가사키본선. 마주오는 열차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이 역을 출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열차 간격도 어느 정도 있어야 안전한 운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사실 보통열차와 특급열차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역에 정차하고 있는 동안 특급열차가 지나가기 때문에 밖에서 바람이라도 세어가며 기다릴 시간도 있다. 또 다른 노선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특별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역이 아닌 곳에서도 교행을 위해 멈추어 있는 열차.


  그러나 지금부터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역이 아닌 곳에 갑자기 정차하는 열차. 처음에는 열차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싶을 정도로 불안감이 들었으나, 이내 차내 방송을 통해 맞은편에 열차가 지나감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열차는 보통열차의 양보로 편하게 다음 구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좌측통행이라는 통행방식이 바뀌어도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통열차가 멈춰있는 곳은 좌측, 우측통행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곡선 구간도 꽤 많아서 열차가 언제 이곳을 통과하는지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열차가 도착할 때 즈음 도깨비처럼 갑자기 나타나듯 등장한다. 그리고 바람처럼 스윽 사라진다.


마주오는 열차뿐만 아니라 뒤따라오는 열차도 보내야 하는 보통열차.


  역이 없는 곳에서도 역이 있는 곳과 마찬가지로 뒤따르는 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정차하는 시간이 있다. 나가사키본선의 특급열차가 단선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은 이런 보통열차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열차끼리 교행을 위해 멈춰있는 열차.


  특급열차에 가려졌지만 보통열차끼리도 교행은 숙명일 수밖에 없다. 달리는 시간보다 멈춰있는 시간이 훨씬 긴 나가사키본선의 보통열차. 그렇게 나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지만 이 열차가 달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특급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작은 역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멈춤 지시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는 나가사키본선의 보통열차는 수많은 시련을 마주하는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그리고 특급열차로부터 외면받는 작은 역들을 어루만져 주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 위해 힘든 길을 헤쳐나가는 이유를 제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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