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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방랑객 Feb 09. 2020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과 열차

루모이본선(留萌本線) 두 번째 이야기

  역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기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록해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역사라고 할 수 없다. 후세에는 그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구 상의 다른 종족들과 차이가 있다면, 자신들이 살아온 것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든 기록을 해놓았다는 점이다. 손을 사용할 수 있고, 또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인류만이 가진 축복받은 자산이 아닐까? 이 자산을 십분 활용해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기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는 철도와 관련된 흔적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그만큼 일본인들은 철도에 대한 관심이 높음을 알 수 있다. 그 흔적을 이용한 스토리텔링도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 또한 일본이다. 일본에서 철도는 이처럼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가 되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세대 간 공감대를 형성해주고 지역 간 유대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한다.

  일본에서 가장 짧은 루모이본선의 마지막 역인 루모이역도 소박한 철도 사진전을 볼 수 있다. 승객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이제 지도 상에 남아있는 것도 언제까지인지 모르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도 '루모이본선은 어떤 노선이었다.' 정도는 알리기에 충분한 자료들임은 분명하다.


루모이역의 역명판과 현판.


  루모이본선의 마지막 역인 루모이역. 이 역은 열차에서 내리면서부터 범상치 않은 역이라는 기운이 감돈다. 석양과 마스코트가 루모이역에 온 것을 환영하고 있었고, 다른 역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세로로 된 현판도 볼 수 있었다. 루모이시의 마스코트인 카즈노코는 우리말로 청어알이라 한다. 그러니까 커다란 간판에 의하면 루모이시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이 있는 마을이며, 청어알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규모가 큰 역이었음을 알려주는 루모이역의 규모.


  그렇게 역에 내림과 동시에 루모이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정보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루모이역의 승강장과 대합실이 말해주고 있다. 비록 지금은 승객을 보기 힘든 작은 간이역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아주 잘 나갔던 역이었음은 분명해 보였다. 시설을 최소화하는 일본의 특성을 고려할 때 거의 거점역 수준의 넓은 승강장과 대합실은 지금 규모의 승하차 인원의 역이었다면 어울리지 않는 옷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루모이역의 모습.


  그러나 지금 현재 루모이역은 개찰구가 단 한 곳에 불과한 데다가 그마저도 무인역이 되는 시간이 더 길어져버린 전형적인 시골 간이역의 형태가 되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간. 그러나 마치 새벽 5시를 연상하게 하는 바깥 풍경이 루모이역을 더 쓸쓸하게 만든다.

  현재 루모이본선을 운행하는 열차는 시간당 1편도 되지 않는다. 전체 구간이 짧기도 하지만, 교행 하는 열차가 단 한 대에 불과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빈 곳이 훨씬 많아진 루모이본선 시간표. 이는 한없이 넓어진 승강장과 빈 공터처럼 변해버린 대합실과 더불어 루모이본선의 존폐 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루모이본선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자료들.


  대합실 한 켠에는 루모이역의 화려했던(?) 과거를 보여주는 흑백사진이 몇 장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전의 제목은 '그리운 루모이본선'으로 여기에도 '본선'이 남아있다. 이 사진을 제공한 곳은 루모이시 교육 위원회로 철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위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처럼 찍어놓은 사진들이 참 인상적이다.

  사진 아래에는 여객 운임표가 수기로 적혀있다. 이 운임표에 적혀있는 역을 보면 지금은 노선도에서 확인할 수 없는 폐역이 된 역도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만큼 알게 모르게 홋카이도에서 철도는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홋카이도의 인구가 점점 삿포로에 집중되면서 삿포로 근교는 철도가 더 늘어나고 신칸센까지 예정되어있는데 반해, 그 외의 지역은 불공평하게도 철도가 고사 직전에 놓여있다.

  운임표 옆에는 스즈란이라고 적혀있는 명판이 남아있다. 루모이본선을 운행하던 증기 기관차의 이름이 스즈란호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스즈란호라는 이름은 루모이본선이 아니라 다른 노선인 무로란본선에서 경유하는 특급열차가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다. 이처럼 루모이본선에서는 사라진 열차 이름이어도 다른 노선의 열차 이름에 고스란히 남아서 이름이 계속 불리고 있다.


과거 추억을 현재까지 이어주는 루모이역.


  사진에는 루모이본선의 선로와 주변 마을들, 그리고 운행했던 열차가 남아있다. 이 열차에 오른 가족 친지를 배웅 나온 사진은 지금 봐도 가슴이 뭉클하다. 역무원과 예전 역명판은 지금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증기 기관차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환경적인 측면도 그렇고 운행함에 있어 손이 너무 많이 가기 때문에 거의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사진을 통해서 마치 지금도 증기 기관차가 운행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전체를 보면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기 어려운 루모이본선의 열차.


  물론 현재 루모이본선을 운행하는 열차 역시 도심에서 볼 수 있는 열차와 거리가 멀다. 계속해서 새로운 열차가 모습을 드러내는 도심 구간의 열차와 달리, 루모이본선을 운행하는 열차는 그 나름대로 시간이 멈춘 듯하다. 단 1량 편성의 열차지만, 이 열차에는 빈 의자가 더 많이 보인다. 그만큼 루모이본선을 이용하는 승객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서 안타까워진다.


선풍기가 달려있는 열차. 수동으로 작동해야 한다.


  시간이 멈춘 루모이본선 열차는 '아직 이런 것이 있어?'라고 생각할만한 선풍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버튼이 있어서 운전실에서 일괄적으로 작동을 하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다. 지금은 냉난방 시설이 열차가 만들어질 때부터 고려해서 일체형으로 나오지만, 이 열차가 만들어질 때만 하더라도 객차 따로, 냉난방 시설 따로 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보통 열차에선 보기 힘든 테이블 좌석.


  이 열차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테이블 좌석이다. 일본에는 여전히 회전이 안 되는 고정식 좌석이 많아서 서로 마주 보는 좌석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가운데 테이블이 낀 좌석은 의외로 마주하기 어렵다.

  루모이본선을 운행하는 이 열차도 테이블이 있는 좌석은 가운데 딱 두 곳뿐이다. 이 좌석은 취식을 하는 승객에게 편안한 공간을 마련해준다. 신칸센 이하 특급 열차에는 좌석마다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지만, 보통 열차에는 테이블이 거의 없다.

  이 테이블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루모이본선을 이용하는 승객 수의 영향이 크다. 만약 도심의 통근 열차처럼 수많은 사람이 열차에 오르내린다면 좌석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테이블을 설치하지 않고 좌석 간격을 조금씩 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차도 움직이는 과거의 흔적이 되어가고 있는 루모이본선. 그 자리에만 있어도 과거로 되돌아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는 발전이 멈춰서 불편하지만 이렇게라도 철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또 하나의 역사가 쓰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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