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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방랑객 Feb 07. 2020

눈과 어둠이 만들어낸 공포스러운 노선

루모이본선(留萌本線) 첫 번째 이야기

  일본인에게도 생소한 노선인 루모이본선은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본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간선 철도 가운데 가장 짧은 노선으로 남아있다. 지도 상에서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홋카이도 철도. 루모이본선도 그 흐름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즉, 루모이본선이 지금처럼 이렇게 짧은 철도가 아니었으나, 노선이 지속적으로 단축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만 남게 되었다.


루모이본선의 위치. 지선 철도처럼 바뀌었다.


  얼핏 봐서는 지선 철도로 보이지만, 간선 철도에만 붙는 '본선'이 남아있는 루모이본선. 지금은 이 노선과 접속할 수 있는 노선이 하코다테본선 뿐이다. 루모이본선의 종착역 역할을 하는 후카가와역이 루모이본선의 유일한 환승역이자 전동 열차를 볼 수 있는 역이다.


운행하기 전 열차의 모습.


  루모이본선을 운행하는 열차는 여느 시골 철도와 마찬가지로 1량 편성의 원맨열차. 이 열차는 원래 이렇게 말끔하게 단정한 후 운행을 시작하지만, 눈의 괴롭힘을 당하면 어느새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른 모습이 되어 다시 후카가와역으로 되돌아온다. 일반적으로 눈폭탄을 구경하기 힘든 사람이라면 그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다.


루모이본선 운행 후 돌아온 열차는 눈사람처럼 바뀌어 있다.


  눈폭탄이라기보다는 눈벼락을 맞았다고 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눈은 흩날리기 때문에 웬만하면 움직이는 열차에는 잘 쌓이지 않는다. 그리고 쌓인다고 한들 바퀴가 있는 아래쪽에나 쌓이기 쉽지 열차 전체에 걸쳐서 쌓이는 모습은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모이본선을 운행하고 돌아온 열차는 신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기에 열차를 이렇게 눈으로 덮어버릴 수 있을까? 그 놀라운 풍경을 담아보았다.


눈이 전쟁 중 총알탄처럼 무섭게 내리는 루모이본선.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겨울이라고 해도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이미 어두워져 버린 풍경을 감상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런데 루모이본선 구간은 오후 5시는커녕 4시가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이미 오후 7시는 넘은 듯 어둠이 몰아오고 있었다. 그만큼 일몰시간이 빠른 홋카이도의 겨울이다.

  거기에 사진에도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퍼붓는 눈과 그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더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은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흩날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거의 진행방향에 수직으로 내려 찍는 듯해서 마치 전쟁영화 중에 총알이 진지를 향해 퍼붓는 듯한 공포감을 심어준다. 이 엄청난 눈보라는 궤도의 침목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선로는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어서 흔적만 살짝 드러낼 뿐이다.


선로마저 덮어버려서 이곳이 도로인지 철도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급기야 선로까지 덮어버린 눈보라. 이는 눈폭탄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루모이본선은 열차가 자주 다니지 않기에 눈이 녹기도 전에 이미 쌓여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곳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헤쳐나가는 운전사의 운전 실력이 엄지 손가락을 들게 만들 정도다. 이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당황하겠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면 적응을 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당연히 이런 풍경에 익숙한 열차 내 승객들도 다 자신이 할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같은 상황이어도 어떤 마음을 가지냐에 따라서 받을 수 있는 느낌도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주는 참 배울 것이 많은 노선이다. 이렇게 눈에 덮인 선로지만 탈선을 하지 않고 평상시 운행하는 것처럼 나아가는 모습이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유일한 교행 구간에서는 고단한 서로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그렇게 절반쯤 갔을까? 맞은편에서 빛이 희미하게 비춰온다. 루모이역에서 출발한 열차와 후카가와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교행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열차는 마치 삿포로 눈축제의 얼음조각을 연상하게 하듯 완전히 눈에 덮여버린 상태였다. 

  절반 정도 왔음에도 이 정도가 쌓였으니 종착역까지 눈이 더 쌓이지 않고 현상 유지한 것도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눈이 스스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열차에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열차가 지나간 흔적으로 인해 간신히 표가 나는 선로. 이 선로는 교행을 한 열차에게 길잡이가 되어 이전과 같이 선로가 보이지 않는 불안한 풍경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열차가 지나간 자리와 지나갈 자리가 확연히 차이나는 선로.


  열차가 지나간 자리와 열차가 지나갈 자리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교행 구간. 교행 구간을 지나면서 흩날리는 눈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한다. 열차를 완전히 덮칠 듯한 기세의 엄청난 눈보라는 두 대의 열차가 서로 협력하는 모습에 감동하였는지 열차들에게 길을 순순이 내주는 것 같았다.


맞은편 열차와 교행 직후 선로는 다행히 눈에 파묻히지 않았다.


  한결 운행이 편해진 열차. 사람도 눈을 가리면 앞을 나아감에 있어 상당히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 열차도 나아가야 할 길에 선로가 보이지 않으면 사람처럼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열차들끼리 협력해서 자연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한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열차는 이전보다 확실히 덜 흔들렸고 엔진 소리도 규칙적으로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루모이본선.


  시간이 흐르면서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밝은 기운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어둠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루모이본선을 덮어버렸다. 이 검은 그림자는 루모이본선에 있는 역의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낮이었으면 다 보였을 역사 건물. 그러나 어둠이 덮치고 나면 가로등이 보이는 구간에만 역사 건물 일부가 보일 뿐, 전체적인 모습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 모습은 오래전 공포를 주제로 한 전설의 고향에서 본 듯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생소한 지역인 루모이본선. 그런데 앞은 거센 눈보라로 시야를 가리고, 어둠을 일찍 불렀다. 거기에 더 나아가 평범했을 역사 건물도 일부를 가려서 무언가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미 쌓인 눈이 만들어내는 반사된 빛은 그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효과로 등골까지 사늘하게 만든다.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쌓인 눈이 공포감을 더 키우고 있다.


  거기에는 이처럼 앞도 볼 수 없게 뒤덮어버린 눈도 한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운행을 하고 있는 운전사 분이 참 대단하게 생각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들에게 눈은 그저 하나의 자연현상일 뿐, 위협이 되거나 앞을 가로막는 방해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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