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by 거성

<쇼코의 미소>

- "네가 그리웠어."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 어린 시절에는 차갑고 어른스럽게 보이던 그 웃음에서 나는 쇼코의 나약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읽었다.

쇼코를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쇼코는 약했다.

분명 쇼코도 그때 느끼고 있었겠지.

내가 쇼코보다 정신적으로 더 강하고 힘센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마음 한쪽이 부서져버린 한 인간을 보며 나는 무슨 일인지 이상한 우월감에 휩쌓였다.


-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것처럼 연기했다.



<씬짜오, 씬짜오>

- 그녀는 아빠의 태도에 실망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라는 마음이 그날 밤, 아줌마와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 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 "그따위 장난 다시는 하지 마."

그 말을 하고 웃었어야 했는데 노력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는' 이라는 말이 소용없어졌다는 것을 실감해서였다.

목이 멧다.


-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한지와 영주>

- 우리는 싸움을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서로를 견뎠다.

감정을 분출하고 서로에게 욕을 해서 그 반동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싸움도 일말의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받지 않았다. 그도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쁘게 대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장 나쁜 건 서로에게 나쁘게 대하지도 못하는 그 무지 안에 있었다.

우리는 예의바르게 서로의 눈을 가렸다.

결국 마지막에 와서야 내가 먼저 그의 눈에서 내 손을 뗐고, 우리는 깨끗하게 갈라섰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그렇게 깨끗할 수 없었기에

그 이별은 우리 사이에 어떤 사랑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그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이동했을 뿐이었다.


- 한때는 그에게 한지에게 느꼈던 감정보다 더 큰 애정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애정이 사라지고 내 눈앞에 서 있는 그가 커다란 종이 인형처럼 보였다.

그건 사랑이 깨진 것과는 다른 종류의 슬픔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일방적으로 한국을 떠나와서 미안하다고, 나도 그동안 고마웠다고 문자를 보냈다.

무감한 이별이었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난다.


- 침묵은 나의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 보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도 한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먼 곳에서 온 노래>

-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나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



<미카엘라>

-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은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 있는 마음 없는 마음을 다 주면서도 그 마음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까봐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마음 안에서, 따뜻했다.



<비밀>

- 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기 바랐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 수술을 한다고 해도 별 가망이 없으리라고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무너졌을 말이었지만 말자는 오히려 편안했다.

더이상의 수술도, 항암 치료도 싫었다.

무엇을 위해 생을 연장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고, 어떤 미련도 없었다.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도 두렵다는 점에서는 죽음과 진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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