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by 거성

#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이렇게나 따뜻하고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눈물겹다.


- 손을 잡는 다는 것은 그처럼 온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 나는 한 가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식어버린 상태에서 상대의 손을 잡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언제나 손을 잡았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으면 그것으로 사랑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열정이 없어진 사랑을 이어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공공연히 나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3개월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아무리 좋아하던 사람도 3개월이 지나면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고 키스는 짜릿하지 않더라.

나는 그런 정열의 소멸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나의 마음이 다하였나보다, 라고 굳게 믿고는 대책 없이 무력하게 끝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늘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더라.

사랑과 열정은 한 몸이 아니었다.

열정이 식는다고 사랑도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만난 지 오 년 십 년 된 사이에 무슨 설렘이 있고 어떤 긴장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손잡기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들은 왜 손을 놓지 않을까.

나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굳게 결속한 이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더 이상 서로를 봐도 가슴이 뛰지 않고 키스는 짜릿하지 않을 때,

잡은 손은 무디어 별 느낌이 없을 때 그것이 왜 절망이 되지 않는지,

어떻게 그럼에도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고 싶다.

그럴 때 두 사람을 이어주는 끈은 무엇인지.

내가 정말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어느 날 정열이 사라져버린 상태를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을 긴 호흡으로 이어갈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제대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너무 빨리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 아름다운 것

- 스무 살이 넘어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모든 시공간이 정지한 채 오직 너와 나만이 존재하던 시간들.

그러나 더욱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내 마음이 멀어지는 걸 느끼던 순간이다.

그때의 충격과 상실감을 무억으로 설명한 수 있을까.

종말의 순간은 너무 빨리 찾아왔고 그 어떤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다.

사랑이 뭘까, 마음은 왜 변할까.


# 사생활

- 나에겐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모든 과정과 비밀이 안전하게 보호된 채 내가 드러내도 괜찮다고 승인한 모습만 세상에 보여줄 권리가 있다.


- 일탈이란, 아무도 모르는 머나먼 타지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나의 집,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에서 언제든 가능한 것이다.


# 꿈

- 꿈이 없다고 고민하지 마라.

그럼 관객이 되면 되니까.

그뿐이다.


# 이어달리기

- 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에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 친구

- 잘 생각해보세요.

내가 듣기 좋은 말만 하거나 당신에 대해 어떤 반대도 하지 않았다면 난 당신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에요.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솔직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지만 정확이 말하면 난 나에게 대해서만 솔직해요.


# 박쥐

- 연애라는 게 뭘까요.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나 홀로 있다가 아무도 없는 세상에 둘이서만 있게 되는 게 연애입니다.

그래서 연애를 해도 외롭지 않게 되는 건 아니지요.

아무도 없는 세상에 기껏해야 한 사람이 더 생기는 것에 불과하니까.


# 간절함

- 내 방 책장 위에 있는 작은 화분 안의 식물이 며칠째 죽어가고 있다.

처음엔 고개를 수그리는 정도였는데 내가 계속 물을 주지않자 지금은 목이 완전히 꺾여지고 온 몸은 힘없이 늘어져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잔인할 정도로 무심하다.

비록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긴 하지만 물 한 잔 떠다 화분에 부어줄 경황이 없을 정도는 아닌데.

저렇게 생명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귀찮은 건지 아무 느낌이 없는 건지 도통 물을 줄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잎이 말라비틀어져 구멍이 뚫린 것은 아니니까 지금이라도 물을 준다면 녀석은 아마 살아날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줄기는 탱탱해지고 잎사귀엔 푸르게 화색이 돌겠지.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바라본다.

그러 바라보고만 있다.


#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 역시 조언이란 건 남의 상황을 빌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 말과 선언

- 아무런 의심이나 회의 없이, 정말로 순수하고 영원하게 느껴지는 말들을 듣고 믿어 의심치 않던 순간들이 그립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듣는 사랑해, 라은 말은 여전히 애틋하지만,

어쩐지 지금의 그 말 속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참 희한한 일 아니냐.

사랑한다는데,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는데,

이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말을 내가 이토록 귀히 여기는 사람에게서 듣고 있는데도 어째서 기뻐 웃지 못하고 슬픔으로 아득한 기분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 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억될 뿐이다.

나를 황홀하게 했던 수많은 말들은 언제나 내 귀에 들려온 순간 사라져버렸다.

말이란 이처럼 존재와 동시에 소멸해버리기에 그토록 부질없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 진정한 친구를 가리는 법

- 바로 그때 알게 된 거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움 일이라는 것을.


# 친구가 해줄 수 있는 것

- 인생은 어차피 혼자고 외로움과 고독을 달랠 기회는 많지 않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에 한 번뿐인 것이다.


# 함께 산다는 것 -결혼 이야기

- 결혼이란, 두 사람이 만나서 데이트를 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한집으로 들어가 여전히 함께 있는 것, 즉 데이트를 한 이후에도 쭉 같이 있다가 나중엔 데이트 자체가 없어지는 것.

그게 바로 결혼이다.


- 돌이켜보면 씁쓸한 것은 사람이 결혼하자고, 우리 같이 살자고 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제발 헤어졌으면 하는 마음보다 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 연애란?

- 누군가의 필요의 일부가 되는 것.

그러다가 경험의 일부가 되는 것.

나중에는 결론의 일부가 되는 것.


# 포르노

-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기다.

그러나 이 시대엔 어쩌면 세련된 사기꾼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 결속

- 진정으로 굳은 결속은

대화가 끊기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를 말한다.


# 행복

- 행복 중의 으뜸이 바로 평범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삶이, 세상이 우리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일상에서 무사히 하루를 보내는 것 만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할게 되는 날, 당신의 인생은 안타깝다.


# 품 안의 애인

- 헤어지는 게 잘하는 것인지는 헤어져봐야 안다.

그게 문제다.


# 두려움

- 세상의 수많은 두려움 중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언제나 마주치는 것.

거절당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 너만 그런 건 아니야

-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설마 내가 그렇게 살기야 하겠어?’ 하던 많은 것들이 나이를 먹으니까 정말 현실이 되더라.


# 연애는 학습이다

- 연애는 학습이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니까.

문제는 배운 것을 써먹게 되는 건 언제나 지금 ‘이 사람’ 이 아님 미래의 ‘다음 사람’ 이라는 것이다.

연애는 그래서 이어달리기이다.

이어달리기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사람에게 받은 것을 그 사람에게 다시 돌려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일간 이슬아 수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