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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EHAN Dec 14. 2017

[꽁트부산] 말 안해도 알제?

 2009년, 어색하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대학을 부산으로 오게 되면서 외할머니댁에 살게 된 것이다. 자취를 하자니 부담이고, 그래도 외할머니 혼자 사시는 데 말동무라도 해드리면 좋지 않겠느냐는 엄마의 판단이었다. (엄마는 당신의 어머니께 말동무는커녕 술꾼을 맡겼다며 이날의 판단을 후회하신다)

 외할머니는 흥남철수 때 이북에서 내려오셔서 부산에 정착하셨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내려와 10대 때부터 행상을 하며 돈을 버셨고, 국제시장에 터를 잡아 미용실, 옷가게, 식당 등 안 해 본 일이 없으실 정도로 억척스럽게 사셨다. 남편을 일찍 여의셨고 세 딸을 먹여 살리고자 스스로 여인의 삶을 포기하고 그렇게 한평생을 고생만 하셨다. 외할머니는 여전히 자신이 열심히 살아왔고 세 딸을 버젓이 잘 키워 시집보냈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한 삶 덕분인지 외할머니는 웬만한 부산 남성보다 더 무뚝뚝하셨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손자도 무뚝뚝이 뚝뚝 떨어지는 재미없는 녀석이기에 영도구 신선동 그녀와 나의 보금자리는 시내버스 지나가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 공기들마저 서로를 어색해하는 진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밥 먹어라.” / “네.” / “설거지 제가 할게요.” / “저리 가라. 필요 없다.” / “네.”

 하루의 모든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사실 그런 생활이 싫지만은 않았다. 학기 초 여느 대학생들이 그렇듯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술도 많이 마셨고, 아침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친구 집에서 자는 날도 많았다. 결론적으로 걱정 끼칠 만한 일이 많았다는 뜻인데… 외할머니는 애써 내가 불편해할까 내색하지 않으셨다. 묵묵히 다음 날 아침 콩나물국이 아침상에 차려졌을 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스로가 ‘민폐 손자’라는 것을 나는 당시 깨닫지 못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야. 니 똑바로 안 하나.” / “뭔 소리고.” / “우리 엄마 힘들게 하면 넌 나한테 죽어.” / “흠. 그래. 알겠다.”

 엄마의 살벌한 경고를 듣고 보니, 이제 알겠다. ‘내리 갈굼’이라 불리는 가혹 행위가 당신의 작전이었구나. 저항과 투항 사이에서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나는 집안 서열 1위의 어른과의 대항은 상상조차 하지 않은 채 당연히 숙이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내 나름의 미안함을 표현할 선물을 준비했다.

 “영화 보러 갑시다.” / “안 해.”

  영화 제목조차 말을 못한 채 거절을 당했다. 포기하지 않는다.

 “이거 진짜 딱 할머니 얘기야. 국제시장이라는 영환데 윽수 재밌다대. 어떤 남자가 이북에서 내리와 가지고 국제시장서 장사하고 뭐 그런 얘긴 가본대 이거 딱 할머니 얘기다이가. 재밌지 않을까?

 내가 이 집에 살면서 가장 길고 상세하게 이야기를 한 날을 꼽으라면 이 날이라 말할 것이다.  

 사실 이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와 함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어렸을 적에 방학이면 할머니 댁에 놀러 가곤 했는데 그때 밤늦게 TV에서 방영되는 북한 관련 소식들. 유난히 집중해서 보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흥남’이라는 지역 명을 당시 처음 알았었다. 요즘도 탈북자들이 방송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들을 주로 챙겨보시고는 하는데 삶에 치여 오로지 먹고살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왔을 그녀가 노년을 맞이하고 이제 와서 당신의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그 모습은 괜히 마음이 찡할 수밖에 없었다.

 가기 싫다 하는 사람 끝까지 붙잡았더니, 영화 보는 당일 아침이 되자 그녀는 모처럼 꽃단장 중이다. 여기서 잠깐, 왕년에 남포동 패션가를 주름잡았던 보세 큰손 우리 외할머니의 패션 감각은 상당히 멋있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20대인 내가 입는 옷을 보고도 지적을 할 정도인데 아무튼 난 아직 멀었다.

 투애니원의 씨엘 정도는 되어야 소화하는 것인 줄 알았던 호피 무늬 바지부터, 젊음의 상징 뉴발란스 운동화, 가죽점퍼, 반지, 목걸이, 선글라스 등등 화려한 액세서리들. 언젠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이 나는 자태였다.

 “나는 시골 같은 데서는 못살 것 같다. 도시가 좋아.” 전형적인 도시 여인이었다.

 영화는 단연 볼만했다. 천만을 돌파한 영화답게 한국의 근현대를 통과하며 극적인 순간들을 여럿 연출했고 그럴 때마다 관객들은 눈물샘을 자아내고야 만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거나 감정이 동요하는 사람들을 보며 ‘영화는 냉정하게 봐야 해’라고 생각하던 나는 이미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저 험난한 세월을 모두 겪어 왔다고 생각하니 그동안의 미안함과 감사함이 밀려와서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할머니 진짜 고생 많이 했네. 와 이거 너무 슬프다. 안글나?” 
 “영화가 과장이 심하네.”

 영화는 끝났고, 흐르던 눈물도 멈췄으며, 이곳은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한마디였다.  영화를 보여줬으니 설렁탕을 사주겠다는 할머니를 따라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영화가 꽤 볼만했었는지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 설명해주신다. 흥남에서 철수할 당시 물에 빠졌던 일, 옷가게를 하면서 장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내가 태어날 때는 세상에 계시지 않았던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영화 한 편을 그 자리에서 더 본 듯하다.

 참 별거 아닌데 막상 나오면 이렇게 좋은데, 그 말 한마디가 참 어렵다. 편하기 때문에 나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편하기 때문에 자꾸 넘어가게 된다. 모두들 그렇게 못하니까 그리도 서럽게 우나보다.

 우리는 여전히 무뚝뚝한 일상이다. 여전히 나의 패션이 못마땅하고, 나쁜 것만 골라 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혀를 차시지만, 묵직하게 서로를 아끼고 있다. 대단히 묵직하게.

 “할매, 예전에 식당 할 때 그 된장찌개 진짜 맛있었는데, 왜 집에선 그 맛이 안 나지?”

 “미원 넣어서 그렇다이가. 그것도 모르고 아직도 시장 애들 만나믄 사장님 된장을 잊지 못해예~ 이런디. 바보들.”

 “오늘 밤엔 그거 넣어서 끓여도.” 

 “니 내 밥이 그래 맛이 없나. 치아라.” 

 “아이 그런 게 아이고, 스페셜한 것도 필요한 거 다이가.” 

 “스페셜 좋아하네. 니는 그래서 안 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입시다. 할매요. 말 안 해도 알제?






2016. 10. 06. 꽁트부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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