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이 던진 화두 때문인지 몰라도, 최근 ‘다름’이라는 키워드와 마주할 일이 많았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업무 관련 미팅을 하던 중에도, 어릴 적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하던 와중에도, 엄마와의 일상적 대화 속에서, 뉴스에 나오는 전 대통령의 미소 속에서까지. 나의 울타리가 작았던 것인지 사회의 다양성이 그만큼 풍부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혼란스럽다. 내 주변에 같음 혹은 비슷함보다도 다름이 더 많아져서일까,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일까, 다름을 존중하는 배려가 부족해서일까.
서두에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이러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언어가 ‘서툴다’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특히 문화 속에서 다양함을 외치고 다양함이 공존하는 사회만이 한 단계 진보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도 아직 일상 속에서 그것을 몸으로 받아들이기까진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행인 것은 서툰 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는 뜻으로 해석되므로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만큼은 고집이 꽤 센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지만 너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지는 않을거야’라는 괴팍한 논리를 행동으로 보여주고는 한다. 남에게 소음이 될지도 모르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양해 없이 틀어놓는다든지 왜냐면 내가 좋아하니까!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기획서를 들이민다든지, 왜냐면 내가 좋아하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떤 문제와 관련하여 해결방식이 답답하다 느낄 때 뜬금없이 화를 낼 때도 있다. 왜냐면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성격 탓에 누군가는 꼰대의 조짐이 보인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정작 가장 많은 답답함을 느끼는 건 나 자신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냉철한 감정컨트롤에서 비롯되어 상대방을 센스있게 배려하며, 노련하게 분위기를 압도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실제로 본 적도 있다) 멋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의식의 흐름은 이내 피곤하게도 산다며 삐딱선을 탄다. 피곤함을 무릅쓴 그 사람의 노력을 폄하한 것이다.
포용. 다름을 넘어야지만 만날 수 있는 따뜻한 단어. 다름이라는 재료를 고급지게 요리해야만 탄생하는 비싼 음식이라고도 하겠다. 아마 앞으로도 비슷한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만날 것 같다. 비슷한 사람을 만나도 그 안에서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모두 다르다는 전제에서 시작되어야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을까. 똑같은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그게 빠르지 싶다.
내가 뒤로 살짝 물러나며 당신의 한 걸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런데 이윽고 급격히 밀려오는 고독은 왜일까.
내가 뒤로 살짝 물러나며 당신의 한 걸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런데 이윽고 급격히 밀려오는 고독은 왜일까.
maru 끄적이다.
maru 끄적이다.
2017. 03. 18. 매거진 쓰다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