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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EHAN Dec 11. 2017

[매거진 쓰다] 그래서, 너의 이름은?

 사람은 미완의 존재라 늘 반대를 동경한다. 아름다운 여인이 더 아름다운 여인을 볼 때, 드라마 속 멋진 남성이 생략된 과정을 뒤로하고 멋지게 문제를 해결할 때, 현실 속에서 하지 못하는 말을 ‘김과장’이 대신해 줄 때. 동경을 넘어 ‘그 사람’이 되고 싶어 얼굴을 고치거나, 옷을 사 입거나, 사소하게는 명대사를 따라 한다거나. 반대적 인물을 통해 나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잊어보려 한다. 그래서 내가 드라마 광인가보다.
 하루에도 수십 번 다른 사람이 되고는 한다. 어떻게든 성실 하려 노력하는 직장인에서, 한없이 게으르고 허점투성이 둘째 아들까지, 친구들 앞에선 유쾌한 재주꾼으로 시작해 방안에선 우울한 자아를 드러내기도 하고, 너에게는 친절한 사람, 남에게는 냉혹한 타인이 될 때도 있다.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들 모두 ‘나’다.
 솔직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드라마를 좋아하면서도 질 떨어져 보일까봐 부러 보지 않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소설책을 좋아하지만 답답해 보일까 싶어 만화책을 보는 ‘척’을 한다. 남자들과의 대화를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프리미어리그 기사를 읽을 때도 있다. 얕은 지식은 바닥을 드러내는 법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반대급부를 통해 수면 위로 상승한다. 드라마 이야기로는 밤을 새울 수 있으며, 박지성은 알아도 축구는 알지도 하지도 못한다.
 나는 나와는 반대의 모습을 가질 순 없는 것일까? 동경을 넘어 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속에서 내가 동경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생각이 이어지게 되었고, 나오지 않는 답 속에서 질문 역시 멈추고 말았다. 여기서 좌절.
 영화 23아이덴티티를 보다 다중인격은 의학사전에도 나와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뚱맞게 ‘세상에 다중인격 아닌 사람도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자세하게 표현되지 않지만 23가지의 인격들의 모습은 모두 한 인간이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싶어 하는 다양한 내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괴물이 된다거나, 다른 성별의 모습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패션 스타일, 혹은 어렸을 때의 동심. 그 외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심리들은 그 23가지에 녹아 들어있다. 증상에서 강도가 심해질 때 그것이 병이 된다면, 우리는 모두 예비환자인 것이다. (내가 술에 취하면 동물 비슷한 무언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동물도 인간의 모습인가.)
 그럼 이렇게 혼란스러운 자아들 틈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끝끝내 본연의 얼굴을 가지지 못하고 완성되지 못한 미완의 작품으로 남게 되지는 않을까, 평생을 수정작업을 거치고 또 거쳐도 결국은 마지막 1%가 모자라 습작으로 남게 될 때. 나는 만족할 수 있을까.
 표현의 한계를 느껴 비유할 만한 사례나 명언을 찾다가, 이것 역시 내가 읽지도 않은 책에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상가가 한 말일지 언대 이 글에 쓰려니 헛웃음만 나와 지우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표현, 멋들어지지는 않아도 그냥 솔직하게 내 표현을 하자면 ‘모.르.겠.다.’
 힙합, 락, 재즈, 클래식, 뉴에이지 등등 오만가지가 들어있는 1000곡의 내 플레이리스트처럼, 어디선가 짜 집혀진 사례들로 떡칠 되어 명확한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 내 기획서처럼, 컬러부터 뭐하나 통일된 게 없는 나의 옷장처럼, 아마도 나는 이런 혼란스러운 인간인가보다.
 한 때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다 너무나도 큰 동질감을 느껴 ‘나도 뭐 그럼 죽어야 되나..?’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던 와중에, 그 날의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너무 좋아 금방 까먹은 적이 있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느 사상가는 ‘인간은 원래 그래’라고도 말했던 것 같다. 가장 하찮으면서도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한 가지 인정은 하고 가자.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으며 앞으로 좋아할 것들이 참 많고 싫어질 것들도 그만큼 많다. 닥터드레가 만든 음악들을 ‘간지’가 난다며 들을 때도 있지만, 미국의 힙합이 현재 어떤 흐름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를 것이다.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를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며 볼 때도 있겠지만, 그의 차기작을 굳이 찾아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또 땡기면 볼 때도 있겠지. 그럼 안되나.    

 딱 그 정도에서, 나는 머물러 볼 생각이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겠다.
 좋아하는 것도 좋아한다고 말하며 살아야겠다.
 
 그래서 첫째로 고백하자면, 나는 글 쓰는 법을 잘 모른다.

Maru 쓰다.

'죽을 때가지 무언가 계속 도모하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다.'


2017. 03. 01. 매거진쓰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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