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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미 Dec 17. 2018

이 남자의 유통기한은 무제한

#1. intro

24살 때부터 시작한 패션 디자이너 생활, 일이 너무 재미있었지만 그만큼 너무 바빠 연애하고 싶어도 연애할 시간이 1분도 없었다. 내가 만약에 35살 때 까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혼자 '독신'으로 살겠다고 가족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이는 점점 차고 있었고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자꾸 닦달을 했다. 남자친구가 있는 친구들과 선배들은 소개팅을 시켜주었고 우리 엄마는 선 자리까지 주선해주었다. 그렇지만 모두 내 성에는 차지 않았다.

"그 남자는 대화해보니 마마보이 같아."

"저 사람은 소매에 때가 꼬질꼬질해."

"오늘 만난 사람은 젖비린내나."

이런 식으로 내가 상대방을 매번 거절하니 한번은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놀라지 않을게. 솔직히 말해도 돼. 너 혹시... 레즈비언이니?"


오 마이 갓! 엄마가 날 이렇게 생각할 줄이야!


내가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은 남자들을 거절했던가. 엄마는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착각할 만도 하다. 나는 소개팅 후, 딱 3일을 만났다. 왜냐하면 그 기간 안에 남자들이 평가가 되었고 3일 안에 정리가 되었다. 그 후로 내 친구들은 나를 '유통기한 3일'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연애에 있어 내가 가졌던 딱 한 가지 신조가 있었는데 하나는 같은 업계의 남자와는 만나지 말자였다. 그 이유는 첫 번째, 사치가 너무 심해서였고 두 번째는 지금껏 본 사람들 만해도 패션 업계 남자들은 대부분 성격이 쪼잔했다. 줄 곧 여성복에서 근무하던 내가 처음으로 캐주얼 브랜드로 이직을 했다. 캐주얼 브랜드로 오니 남녀공용 스타일이 많아서일까 회사에는 남자 디자이너와 직원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 중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같은 디자인실은 아니고 건너편에 있는 다른 브랜드의 디자인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다지 잘 생긴 것 같지는 않은 데 작고 하얀 얼굴의 그가 신경이 쓰였다. 그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과 명품으로 휘감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내 스타일의 옷차림도 아니었다.


'어휴, 저 놈 봐. 꼴에 목걸이하며 반지며 진짜 밥맛이다.

저런 놈은 분명히 통장이 텅장이거나 게이일 거야.'


저런 놈이랑 결혼하면 돈 한 푼도 못 모으겠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를 아니꼽게 보면서도 궁금하기도 하고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내가 이상했다. 저 남자의 이름이 궁금해 비상연락망을 괜히 한번 '쓱' 쳐다보았다. 그 순간 괜한 자존심이 발동되었는지 그의 연락처도 보였지만 이름 석 자만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그는 우리 디자인실 팀장님과 친하여 디자인실에 자주 들락거렸고 그가 올 때마다 나는 괜히 내 책상의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었다. 아무런 약속이 없던 어느 금요일 저녁, 디자인실 김대리가 "지훈오빠랑 같이 술 한 잔 할래?"라고 물었다. 비상연락망에서 보고 기억해두었던 그의 이름이다. 나는 약속도 없었고 새로 이직한 회사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낼 겸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나온 저 남자, 술 한 잔도 못 마신딘다.


'참나, 어이가 없네. 술도 못 마시는 데 왜 나와 앉아 있는거야?'



내 나이 34살, 나는 딱히 여자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해 나만의 YOLO(You Only Life Once:인생은 한번뿐이다) 인생을 즐기는 독신주의자였다. 가족들에게 독신으로 살겠다고 엄포를 하고 결혼자비로 차 한대와 집을 계약했다. 매 여름휴가 때나 샌드위치 휴무가 생길 때마다 나홀로 서핑을 하러 발리로 떠났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여자 친구가 생긴다 하더라도 같은 업계의 여자와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보아온 패션업계 여자들은 너무 사치가 심하고 예민하고 까칠했다. 한 마디로 재수 없었다. 이 회사에서만 본 여자 디자이너들만 해도 그랬다. 2014년 3월,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건너편 디자인실에 새로 온 디자이너가 우리 디자인실에 인사를 왔다. 하얗고 긴 생머리, 말투가 약간 어리바리 한 것 같아 막내 디자이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꽤 많다. 옷 입는 스타일도 이 회사에서 보던 여자 디자이너들과는 다르다. 여성복 디자이너들과 캐주얼 디자이너들은 스타일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우리 디자인실 애들만 해도 바로 축구를 하러 나가도 될 만큼 꼭 선머슴처럼 입고 다녔다. 내 자리에서 그녀의 자리가 보인다. 그녀는 책상을 엄청 더럽게 쓰는 것 같다. 작업지시서를 그려놓은 것들 하며 널브러진 샘플 부자재들 그리고 책상 서랍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열려있다. 저기 어떻게 앉아서 일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의자는 맨날 밖으로 돌려놓고 퇴근을 해서 마치 화장실에 잠깐 가있는 사람의 자리 같다. 자리만 봐서는 언제 퇴근을 했는지, 언제 출근을 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더러운 책상 옆에 가방이 놓여있으면 그녀는 출근을 한 것이다.

저쪽 디자인실은 야근을 자주 해서 임 팀장에게 놀러 감 겸 그녀가 궁금하기도 해서 가 보았다. 여성복은 전부 옷 디자인 도식화를 손으로 그린단다. 처음 캐주얼 브랜드에 와서 컴퓨터로 옷 도식화를 그려 보는데 일러스트 툴을 할 줄 몰라 '낑낑'대고 있었다. 옆에 동료들이 일러스트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저렇게 쉬운 걸 못 하다니.'

말을 걸고 싶었는데 그냥 참았다.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는 게 쉽지 않은 지,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묶는다. 머리를 풀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괜히 말을 걸고 싶어 그녀가 들리도록 임 팀장에게 말을 했다.

"쟤 좀 낭창한 것 같아."

임 팀장이 그녀를 가르키며

"누구? 세아?"

라고 반문한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녀가 들었는지, 하나로 묶은 머리를 말 꼬랑지처럼 흔들며 발끈한다.

"낭창하는 게 무슨 말이에요?"

"어리바리하다는 사투리야."

내 말을 듣자마자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그러더니 더욱 더 발끈한다.


"이거 좋은 말 아니잖아요. 경상도 사람이에요?"


나는 그냥 한 소리인데 너무 날카롭게 들어 듣기 나름이라고 둘러서 대답했다. 나는 이 디자인실 애들 중에 그녀만 빼고 다 친하게 지냈다. 그녀는 복도에서 나와 마주보고 지나쳐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원래 여자 디자이너들은 싸가지도 없고 재수도 없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왜 인사를 안 할까?' 싶기도 했다. 내가 그 디자인실 애들하고 친하게 지냈더니 그 중 한 명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술 한 잔 하실래요? 세아랑 마시기로 했어요.]

나는 사실 술 한 잔도 못 마시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일이 있다고 하며 약속을 취소했다.



그림 : 봄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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