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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해 Mar 30. 2023

02년생의 이별 방법

해당 포스팅은 유튜버 '썰플리' 채널의 영상을 보고 작성하였습니다. 해당 썸네일은 비평의 용도로 인용하였고, 썸네일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썰플리 채널에 있습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나는 후임의 고민상담을 들었는데, 내가 같은 나이에 했던 고민이 아닐 때 가장 크게 느낀다. 요즘 연애 상담을 해주면서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특히 중, 고등학생들과 20대 초반인 00년대생들의 연애상담을 해줄 때, 아.. 내가 연애 상담을 해주는 것이 맞을까..? 생각이 든다. 아직 나는 이룬 것이 없기에 어리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들의 입장을 들어보니 나는 삼촌뻘인 기분이 든다. 나이 차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지만, 내가 겪은 청소년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상담을 할 때,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한다. 그래 내가 이 상황이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내가 아직 성장하지 못한 24살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마치 문학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친 후에야 답변을 해준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00년대생들의 입장을 완벽히 상상하기 힘들다. 마치 SF소설을 듣는 듯하다. 지금부턴 사례를 통한 예시를 들어야겠다. 내가 어떤 것에서 어려워하는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오늘 이야기할 것은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02년생들의 이별 사례를 통해 이전세대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잠수 이별을 선호한다. 90년대생 이전의 사람들에게 가장 최악의 이별이 무엇이냐고 꼽으라고 한다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단연코 1위는 잠수 이별일 것이다. 우리 나이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애인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다. 첫날엔 걱정, 둘째 날엔 분노, 셋째 날엔 부정, 넷째 날엔 허탈함 다섯째엔 증오를 느끼게 된다. 이런 잠수 이별만큼은 한국사회에서 금기시되는 행동이었으므로 대부분 '문자(카톡),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는 것이 괜찮을까?'에 대한 열띤 논의를 하곤 했었다. 이러한 세대 차이는 예의라는 단어의 범주에서 해석될 수 있다. 90년대생 이전의 사람들이 보통 친구들의 이런 고민을 들었을 때 보편적인 대답은 '예의가 아니다.'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00년대생들에겐 잠수는 예의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두 번째, 연애의 기회가 많고, 지역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94년생인 나때만 하더라도 SNS는 싸이월드와 버디버디가 끝이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학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는 보습학원 말고는 거의 없었다. 굳이 다른 학교 친구를 찾아서 놀기엔 지금 있는 친구들만 사귀기도 힘들었다. 애초에 같은 학교 사람이라도 선후배를 알아가야 할 만큼 인적자원이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1학년에 13반에 35명이 기준이었다. 455명을 친구로 사귀기도 벅찬데 무슨 다른 학교, 선후배까지 알아야 하는가? 서든엔 3명만 있어도 평생 할 수 있었고, 스타는 1명만 있으면 됐다. 


 그러나 요즘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서울은 2023년 초등학교 1학년처럼 각 학년에 60명 정도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지방에 있는 친구들은 상황이 다른 것 같다. 같은 학교 내에선 만나려고 하지 않고, 더 넓은 범위까지 확장시켜 연인을 만난다. 아직 어떤 시스템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소개의 소개로 만나도, 범위가 광역시까지 넓혀진 것 같다. 고등학생이면 경제적인 문제, 통행료 때문에 조금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엔 별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알바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나처럼 한 달에 만원, 5만 원으로 살진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문자 하나에 15알씩 나가고, 2000알을 쓰면 아무것도 못하던 나 때와 지금은 새마을 운동시절과 나때를 비교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이들에게 연애상담을 해주려면 더 많이 배워야 함을 느꼈다.


 셋째로, 연애에 대해서 열려있다는 점이다. 이점이 가장 의아한데, 내가 00년대생들의 특징을 상상했을 때, 느낀 점은 90년대생들이 만들어놓은 인터넷 환경을 가장 빠르게 학습한 세대이고, 이는 인터넷 세상의 가치관을 가장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세대일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정말 완벽히 반대로 가고 있다. 페미니즘과 PC주의가 성행하던 인터넷 세상의 가치관은 00년대생들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가치관이 되었고, 퐁퐁남, 비혼주의등으로 이야기되는 현재 대한민국 남성들의 초식남 형태가 무색하게, 연애에 대한 자유롭고 가벼운 만남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90년대생들의 연애관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해서 뭐 하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대로 00년대생들의 연애관은 "지금의 나는 이러고 싶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유튜브 썰플리에서 요즘 02년생들의 이별방법이라고 나온 숏츠가 이 글을 써야겠다 하고 마음먹게 만들었다. 흔히들 우리나라가 10년 전의 일본을 따라간다고 이야기한다. 일본도 페미니즘이 한번 휩쓸었고, 그 이후에 나온 개념이 초식남이다. 연애와 결혼에는 크게 관심 없고, 내가 좋아하는 게임 같은 취미 생활을 하며, 책임을 지지 않고 조용히 사는 사는 남자들을 말한다. 문제는 여자들은 결국 남자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남성들로부터 종속되는 기존의 삶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주장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없어도 괜찮다고 주장을 했지만 이에 부합하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들을 필요로 했다. 연애를 해보지 못하거나, 경쟁령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남성들의 경우 충분히 연애와 결혼에 경쟁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식남의 집합에 입주하게 된다. 이는 결국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하락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의 90년 대생들은 역사적 이론처럼 일본을 따라가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00년대생들은 일본보다는 미국의 공화당 쪽의 사상에 가깝다. 물론 00년대생들이 미국 공화당의 의견을 보고 따라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은 분명 90년대생들이 만들어 놓은 인터넷 세상에서 각각의 사상들이 충돌하는 것을 보고선,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는 각자의 가치관 확립을 통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00년대생들의 이별과 사랑 방식에 대한 데이터가 많이 쌓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수 이별등 직접적인 의견 표출은 피하며,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을 중시했던 기존 세대보다 온라인의 비중이 커졌으며, 인스타그램 등의 자기 PR에 대한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점을 차이점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사진 하나도 같이 찍기 싫어했던 것이 90년대생의 청소년기이다. 지금은 자기 PR이 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사람들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나는 00년대생들이 신념의 세대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생각한 논리적 설명이 완성되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세대라는 뜻이다. 이러한 배경은 90년대생들이 만들어 놓은 인터넷 문화에 기인한다. 90년대생들의 인터넷 세상은 틀린 것은 용납되지 않는 세상이다. 가치관에 가장 영향을 받는 청소년기에 이러한 사상들을 접했으니 이들이 팩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배제할 수 없다. 90살이 다된 노모가 손녀에게 주기 위해 300원짜리 초코파이를 훔친 사건에 징역 6개월을 때릴 수 있는 일반인은 없다. 적어도 나는 없다고 믿는다. 모든 상황에서 감정적으로만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모든 상황에서 논리적으로만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 지점에서 타협하는 방법을 지금의 00년대생들에게 알려줘야만 한다. 그것이 어른의 역할이다. 김치찌개가 너무 짜면 물을 넣고, 너무 싱거우면 소금을 넣어야 하는 지혜를 어른이 아니면 누가 알려준다는 말인가? 지금의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너무 방치하고 있다. 


 나는 00년대생들이 너무 논리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큰 우려를 느낀다. 세상은 그렇게 논리적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논리적이라는 이유는 물론 그 어느 것보다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객관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하는 능력이 낮기 때문에 아집이나 현혹에 빠지기 쉽다. 나는 분명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객관적으로 맞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취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많아졌을 때 돌아본다면 그것이 내 감정에 의한 선택임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논리적이라는 착각에 빠져 감정을 배제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 어른들이 바로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의 어른들은 정보의 늪에 빠져 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의 상황은 내가 청소년일 때와 정말 많이 다르다. 생각도, 환경도, 목표도 너무 다르다. 그러나 정말 재밌는 사실은 그 모든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만약에 고등학생이었으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지에 대한 결론으로 답변을 하면 100이면 100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몇십 건 밖에 되지 않는 상담이 어떠한 데이터를 내기엔 부적절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꽤나 높은 확률로 내 생각을 이야기했을 때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 팩트다. 결국 이러한 결과는 상황과 사상, 가치관, 환경은 달라졌을지언정 내가 중고등학생 때의 본질과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MZ세대들을 기성세대는 자신들과 다른 한국인이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상황이 달라졌을지 몰라도 MZ세대 모두가 한국인이고, 기존의 세대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00년대생들도 마찬가지다. 말과 행동, 생각, 사상, 환경이 다를지라도 이들 역시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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