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인생에서 유채색 인생으로

by 비익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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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라는 대기업에 들어와 한창 잘 나갈(!)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완벽히 일에 중독되어 있었고, 매일 야근에, 매주 주말 하루는 꼭 회사에 나가 일을 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당시 상사와 죽이 잘 맞았다. 상사는 기꺼이 나의 노고를 인정해 주었고 충분히 그 노고를 보상해 주었다. 사내 최우수 직원상을 탔을 때의 감격스러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전사 조회 시간에 전직원들 앞에 서서 사장님으로부터 상을 받고 나는 마치 연기대상을 받은 배우처럼 수상소감까지 말했었다. 내 직장 생활의 (유일한) 전성기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또하나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 당시에 같은 팀의 여자 후배가 내게 했던 말이다.

"과장님은 회사 외에 또 어떤 삶을 살고 계세요?"

"저는 회사가 유일한 삶이죠."

"과장님의 삶은 마치 흑백 영화 같네요."

"..."


삶이 흑백 영화 같다는 이야기. 그 말이 왜 이렇게 기억에 남을까~ 당시 나는 이 말을 꽤 곱씹었던 것 같다. 별로 좋은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으니까. 맞다,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인 게 맞다. 후배는 내게 왜 그렇게 사느냐고 따끔한 일침을 가한 것이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 나는 전형적인 범생이였다. 학교와 집만 오갔고 일절 일탈 행위 비스무레한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또박또박 '서울대'라는 목표만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갔다. 친구도 많이 사귀지 않았다. 삶에 있어 공부가 무조건 1순위이고 친구는 부수적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목표했던 서울대에 들어가고 나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랐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3월의 어느 날, 늦은 술자리 한 켠에 앉아 나는 그간 살아오면서 처음 느껴 보는 극도의 허무함을 느꼈다. 이게 뭐지?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 거지?


이후 대학원이라는 시행 착오를 거쳐 직장에 들어갔다. 직장에 들어가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꼭대기를 향해 달려가면 되겠구나. 임원 아니 그 이상을 목표로 다시 앞만 보며 달려가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내 삶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2차원의 삶이었다. 그리고 완전한 무채색의 삶이었다. 그런 내 삶을 후배가 정확히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흑백 영화'로 내 삶을 칼같이 정의해 준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후 내 삶은 반전을 맞이했다. 내 삶에 드디어 새로운 인자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서이동, 우울증, 희망퇴직, 부동산 등의 다채로운 인자들이 내 삶에 들어와 준 것이다. 비로소 나는 흑백이 아닌 색깔이 있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불안하지만 다채로운 삶이다. 이제야 삶의 이야깃거리도 생기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조차 쓰기 힘들었던 삶에서 이제 여러 페이지는 거뜬히 쓸 만큼의 삶이 된 것이다. 이제야 10여년 전의 그때 그 후배에게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이제 컬러 영화 같은 삶게 됐다고~ 그래서 지금 삶이 참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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