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지지자에 대하여: 함께 걷는 길 위의 존재들

by 이병일

인생에서 가치관을 뒤흔들 만큼의 사건을 겪고나서,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곁을 지켜주는 ‘지지자’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옆에 있어 주는 것을 넘어, 우리의 무너진 신체 예산을 다시 채워주고, 회복탄력성의 근육을 단련하게 돕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이 됩니다. 저는 이 챕터에서 저와 제 가족의 삶을 지탱해 준 소중한 지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교수님의 한 마디: 따뜻한 통찰의 지지

연서는 주기적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신경외과를 중심으로 안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 다양한 분과의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중증 장애가 있는 아이를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간호사 선생님과 커뮤니케이션하며 돌봄을 이어가고 있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연서가 다섯 살 때 만났던 간호과 교수님의 상담 프로그램은 제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중증 장애 아동의 부모를 대상으로 아이 케어는 물론, 부모와 가정 내 힘든 점은 없는지 세심하게 상담해 주셨습니다.


그날도 연서 케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동석하신 간호사 선생님께서는 저와 아내가 연서를 얼마나 세심하게 돌보고 있는지 옆에서 거들며 설명해주셨죠. 석션(suction)부터 아이 자세 바꿔주기, 목욕시키기, 가래 쌓이지 않도록 등 두드려주기, 여러 종류의 약 제대로 챙기기, 위루관 부위 소독 등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만, 저희 부부는 어릴 때부터 해야 할 일은 ‘FM대로’ 진행하는 스타일인지라, 나름대로 잘 대응해온 것 같습니다. 퀸사이즈 리클라이닝 침대를 거실에 두어 24시간 연서를 언제든 돌볼 수 있게 해둔 점, 그리고 24시간 케어를 위해 양가 부모님의 도움과 함께 저와 아내가 자는 시간을 어떻게 배분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교수님께서 저와 아내는 힘든 점이 없는지 물으셨을 때, 우리는 그저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 자체가 안타까울 뿐 괜찮다고 답했습니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첫째 연우는 어떤지 물으셨습니다. 저는 최대한 침착하게 답하려 애썼지만, 연우 이야기가 나오자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아빠 입장에서 볼 때, 연우는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착한 아이인데, 연서가 태어난 이후 평범하지 않은 동생을 엄마 아빠가 정성스레 돌보는 것에 대해 옆에서 혹시 너무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생길까 봐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아이의 나이에 비해 너무 배려하는 행동을 보이거나, 본인에게 관심이 덜 가는 것에 속상해 하면서도 그걸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가능한 한 지켜보고, 밝은 아이로 자랄 수 있게 신경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함께 책 읽고, 몸으로 놀아주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애쓰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죠.


그 자체로도 울컥했는데, 여기에 대한 교수님의 반응 때문에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습니다. 교수님은 잠시 저를 조용히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빠가, 특히 이렇게 집에 우환이 있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디테일하게 관찰하고 마음에 짐을 두지 않고 자랄 수 있게 신경 쓰는 경우를 잘 못 본 것 같아요. 아빠가 연우에게 정말 세심하시네요.” 그 한마디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속에 깊이 박혀 저를 지지해주는 강력한 주문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수고 많으십니다’라는 위로가 아닌, 제 마음속 깊은 곳까지 헤아려주는 따뜻한 통찰이 담긴 지지였습니다.


선배님의 한 마디: 따뜻한 위로의 진심

저에게는 전략 컨설팅을 처음 시작할 때 만났던, 첫 프로젝트의 프로젝트 매니저(PM) 선배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저에게 전략적 사고와 함께, 고객에 대한 ‘진정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첫 프로젝트의 최종 보고회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현업 임원 및 팀장급 이상 30여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보고를 받으신 부회장님께서 “이렇게 잘 정리된 보고서, 그리고 이렇게 좋은 보고는 정말 오랜만에 받아본다. 이대로 잘 진행해보자.”라고 극찬하셨던 일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그로부터 3년 정도 후, 그 선배님은 첫 프로젝트를 했던 바로 그 고객사의 마케팅 상무로 스카웃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 본인 차를 해당 회사의 제품과 브랜드로 래핑(Wrapping)하고 다니시더군요. 그 진정성이란! 시간이 흐른 뒤, 그 선배님은 항공 계열사 CEO로 영전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항공사에 다니는 선배가 이 선배님과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하여 셋이서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당시 연서가 태어난 지 1년 정도 된 시점이라, 저 또한 연서 케어에 몰두하느라 한동안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고, 이 선배님도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근황을 나누던 중, 연서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연서 케어에 서툴거나 시행착오를 겪는 점들도 많았던 터라, 제 이야기 속에는 힘듦이 배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연서가 태어나면서 거의 하늘나라로 갈 뻔했고, 의사도 살 확률을 50%로 보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장애가 있긴 하지만 살기 위해 애써주어 고맙고 우리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식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털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은 지금까지도 제게 너무 큰 힘이 됩니다.


“연서도 너희 집에서 태어나서 다행일 거야.”


그 한마디는, 제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맺혀 있던 모든 자책과 안타까움을 한순간에 녹여주었습니다. 연서에게 부족한 부모가 아닌지, 혹시 우리 때문에 더 힘들지는 않은지 하는 수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이 그 한마디에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하고 있구나. 연서도 우리와 함께여서 행복할 수 있구나.’ 그 말은 저의 무너진 신체 예산을 다시 채우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는 따뜻한 위로이자 강력한 지지였습니다.


가족이라는 뿌리: 든든한 버팀목

저에게, 그리고 우리 가정에는 정말 감사하게도 주변에 너무 좋은 인생의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든든한 뿌리는 바로 양가 어머님들입니다. 다행히 두 분 모두 가까운 곳에 사십니다. 장모님은 걸어서 10분 거리, 어머니는 차로 20분 거리에 계셔서 자주 오셔서 아이들을 돌봐주십니다. 사실 저와 아내가 이 모든 상황을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주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집에서 다양한 놀이를 해주시고, 놀이터에서 함께 뛰어놀아 주시며 아이들의 마음에 즐거움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번지는 웃음꽃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장모님께서는 가까이 사시는 관계로 수시로 들러주시고, 특히 산을 좋아하시다 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아차산 같은 주변 산을 함께 다녀주시곤 합니다. 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 자연 속에서 뛰어놀며 건강하게 자라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저희 부부는 더없이 큰 위안과 감사를 느낍니다. 두 분 어머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지지가 없었다면, 아마 저희는 이 길을 걸어오기 훨씬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저희의 신체 예산을 가득 채워주는 가장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30년 우정의 힘: 에피쿠로스의 지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들의 도움 그 자체보다는 친구들이 나를 도울 거라는 확신이 더 큰 힘이 된다.” 이 말은 저의 30년 지기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벌써 30년 가까이 우정을 유지해오고 있는 열 명의 친구들. 우리는 고등학교 1, 2학년 때 처음 만나 학교 안팎에서, 그리고 농구 코트에서 학창 시절 대부분을 함께 보냈습니다. 성적은 제각각이어서 대학도 달랐고, 전공 또한 제각각이다 보니 사회생활의 접점도 찾기 어렵습니다. 다들 일산이나 인천, 수원 등으로 이사도 가면서 세 명 이상이 30분 내에 모이기도 힘들어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간 우리의 우정은 여전히 한결같습니다.


서로의 풋풋한 연애사를 공유하던 시절을 넘어, 한 명이 결혼하면 나머지 아홉 명이 축가를 부르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뜬금없이 바다를 보며 회에 소주 한잔이 그리워 밤에 훌쩍 떠났던 강릉 여행, 그리고 그 수십 번의 즉흥적인 여행들은 이제 추억 저편에 있지만, 이제는 아내와 아이들을 대동하고 미리 준비해서 대규모로 떠나는 가족 여행이 익숙해졌습니다. 다행히도 친구들의 아내들 한 명 한 명이 우리의 또 다른 친구가 되었고, 이제는 그들끼리도 돈독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다들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가면서’ 성격이 무뎌져 가는 것을 느낍니다. 10대, 20대 당시에는 다들 한 성격 했던 것 같은데, 몇몇 소소한 다툼을 제외하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참 잘 지내왔습니다. 이제는 누가 문제를 일으켜도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별일 아니듯 넘어가곤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또 다른 가족이 되어 갑니다.


세계 3대 명강의 중 하나로 꼽히는 하버드 대학교 ‘행복 강의’에서 탈 벤 샤하르 교수는 ‘가장 행복한 그룹’ 10%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그룹들처럼 불안, 스트레스, 좌절을 느끼지만, 놀랍게도 빠른 회복력과 뛰어난 면역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샤하르 교수는 이들의 행복이 선천적인 원인보다는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힘’ 덕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30여 년 전 저의 고등학교 시절을 행복한 기억으로 채우고, 이 책을 쓰는 현재도 제가 ‘가장 행복한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이 친구들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저의 회복탄력성을 키우고, 삶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관계의 힘: 사회적 지지와 회복탄력성

앞선 저의 경험담에서 보셨듯이, 우리 삶에서 ‘지지자’의 존재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인 위로를 넘어, 우리의 신체 예산을 회복하고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데 과학적으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성인 발달 연구(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는 무려 8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백 명의 삶을 추적하며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지 연구했습니다. 이 연구의 총책임자 로버트 월딩어(Robert Waldinger) 박사는 수많은 데이터 분석을 통해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좋은 관계가 우리를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고, 신체적 건강이 더 좋으며, 뇌 기능도 더 잘 유지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특히, 단순히 친구가 많다는 것보다 ‘관계의 질’이 더 중요하며, 갈등이 적은 따뜻한 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가 스트레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신경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Robert Sapolsky)는 그의 저서와 연구를 통해 사회적 유대가 부족할 때 만성 스트레스 반응이 증가하고, 이는 면역 체계와 심혈관계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반대로, 강력한 사회적 지지는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낮추고, 면역 기능을 강화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고 지지받을 때, 우리의 몸은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더 잘 회복하고 적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가정이 꽤 많습니다. 신생아 10만 명당 1~2명 정도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제 아내는 ‘옹달샘’이라는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한 부모님들과 마음을 나누고 상황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곤 합니다. 그리고 저희 가족을 지켜보시는 많은 분들이 때로는 따뜻한 위로로, 때로는 진심 어린 배려로 도움을 주십니다. 양가 가족들의 따뜻한 지원은 무엇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특히 힘든 시기일수록, 우리 주변의 지지자들은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첫째 아이 연우가 밝고 건강하게, 항상 행복한 모습으로 자라주고 있는 것이 너무 고맙습니다. 둘째 아이 연서가 점점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때때로 드는 아픈 생각에도 하루하루 웃음을 잃지 않고 저와 아이들을 챙겨주는 아내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느낍니다.


이 모든 지지자들에게 감사하며, 우리 또한 그들에게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을 소홀히 하지 말고,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으로 감사함을 표현하며, 우리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세요. 서로가 서로의 지지자가 될 때, 우리의 신체 예산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삶의 어떤 파도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단단한 회복탄력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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