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괌은 변덕스러운 연인 같았습니다. 눈부시게 맑은 하늘을 보여주다가도 금세 묵직한 구름을 몰고 와 비를 뿌렸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투명한 햇살을 쏟아냈습니다. 그 예측 불가능함마저도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는, 묘하게 느긋한 아침이었습니다.
호텔 1층 로비에서 몇 걸음만 나서면 야외 수영장이 펼쳐졌고, 그 너머로는 새하얀 모래사장과 끝없는 태평양이 이어졌습니다. 수영장 한가운데, 각도 조절이 되는 하얀색 비치체어 20여 개는 아침부터 이미 만석이었습니다. 조식을 든든히 챙겨 먹고 느긋하게 내려온 우리는 운 좋게 두 자리가 나란히 빈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리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두툼하고 새하얀 비치 타월을 의자 위에 침대 시트처럼 꼼꼼하게 깔았습니다.
연서는 유모차에서 수영장 의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야자수 그늘 아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였습니다. 연서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다가 이내 다시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곤히 잠든 연서의 가느다란 호흡 소리만이 주변의 물소리와 섞여 잔잔하게 울렸습니다. 연서의 유모차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챙겨 온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땀이 살짝 배어 나오는 날씨였지만,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목덜미를 스칩니다. 연서에게 선글라스를 씌워주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앉히며 잠시나마 다른 풍경을 보여주려 애썼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사이사이, 고개를 들어 수영장 풍경을 눈에 담습니다. 연우는 이미 물속에 들어가 혼자서도 제법 능숙하게 헤엄을 치며 이곳저곳을 누빕니다. 물을 좋아하는 것은 연솔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튜브에 몸을 맡긴 채, 엄마와 언니, 그리고 할머니 사이를 오가며 연신 “꺄르르” 함박웃음을 터뜨립니다.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물장구를 치는 연솔이의 모습, 그보다 조금은 의젓하게 물속을 유영하는 연우의 모습, 그리고 그 모두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내와 할머니의 미소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물방울처럼 톡톡 터져 나와 수영장 가득 퍼졌습니다. 인피니티 풀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나는 연솔이를 번쩍 들어 올려 파란 하늘에 닿을 듯이 흔들어주었습니다. 까르르 터져 나오는 연솔이의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우리의 그림자가 물속에 길게 드리워지며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괌에서의 오전 일과는 유유히 흘러갑니다. 이렇듯 우리는 매일의 오전 일과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석양 아래, 축배를 들다
괌의 해변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파란색이던 하늘은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마법처럼 색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옅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부드러운 연분홍빛으로 번져갔고, 마지막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보라색으로 밤을 감싸 안았습니다. 구름마저 붓질한 듯 길게 늘어져 황홀경을 더해갑니다. 그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아래, 우리 가족은 해변으로 내려가 번갈아 가며 이 아름다운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연우는 바닷물이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며 촉촉해진 모래 위에 발을 살짝 담가봅니다. 작은 파도가 발등을 간질이자, 간지럽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뒷걸음질 칩니다. 연서의 유모차는 해변의 고운 모래 위를 지나기엔 역부족이었죠. 그래서 연서는 할머니와 함께 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아 석양을 즐깁니다. 할머니 품에 안겨 바다를 바라보는 연서의 눈동자에도 노을빛이 물드는 듯합니다. 초록색과 오렌지색이 섞인 똑같은 원피스를 맞춰 입은 연우와 연솔이는 석양빛을 받아 더욱 생기 넘쳐 보입니다. 아내와 연우, 연솔이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노을빛만큼이나 따뜻합니다.
우리는 바닷가 바로 앞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갓 튀긴 감자튀김의 고소한 냄새,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 요리와 바삭한 치킨 등 다채로운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빠질 수 없었고, 아이들은 오렌지 주스를 높이 들며 우리를 따라 “건배!”를 외쳤습니다. 연우는 동생 연솔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먹여주기도 하고, 둘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연솔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연우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행복해했습니다. 창밖으로는 어느덧 파도 소리만 어렴풋이 들릴 정도로 어둠이 짙게 깔렸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의 저녁이 평화롭게 마무리되어 갑니다.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가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긍정적인 추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죠. 심리학자들은 공유된 즐거운 경험이 가족 구성원들 간의 정서적 유대를 깊게 하고,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자원’을 구축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자연 속에서의 경험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전반적인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괌의 아름다운 석양 아래에서 함께 나눈 저녁 식사는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소중한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시내 탐험, 작은 발견들
둘째 날 오후는 시내 탐험에 나섰습니다. 괌의 날씨는 여전히 오락가락했죠 쨍한 햇볕이 쏟아지다가도, 갑자기 후드득 비를 뿌려댑니다. 빗물이 씻어낸 도로는 짙은 색으로 반짝였고, 야자수 잎사귀는 더욱 선명한 초록빛을 띱니다. 가던 길은 다소 오르막이었지만, 묵묵히 연서의 유모차를 밀었고, 아내가 옆에서 힘을 보태줍니다. 연우와 연솔이는 할머니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옮깁니다. 낯선 풍경과 뜨거운 공기, 그리고 이따금 내리는 비가 오히려 잊지 못할 장면들을 만들어줍니다. 어둠이 내린 괌 시내의 불빛 아래, 할머니 품에 안긴 연솔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합니다. 아내와 두 딸이 하드록 카페 앞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모습은 여행의 즐거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쇼핑몰에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더위를 식혀줍니다. 이곳에서는 각자의 ‘플레이 타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연우는 엄마와 함께 예쁜 옷을 고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텀블러를 찾아 진지하게 쇼핑 삼매경에 빠졌죠. 할머니는 연서와 함께 이리저리 둘러보며 새로운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나는 연솔이와 함께 장난감 코너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작은 장난감 아이스크림 가게와 주방놀이 기구들이 마련된 공간이 있었는데, 우리는 한참을 가게 주인과 손님 놀이를 하며 까르르 웃었습니다. 기차 모양의 장난감에 앉아 해맑게 웃는 연솔이의 표정은 지나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미니 자동차들을 손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트랙 공간을 발견했고, 결국 한 세트를 사들고 나왔습니다.
쇼핑몰에서 나와 더위를 식힐 겸, 붕어빵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습니다. 가게 앞에 놓인 귀여운 붕어빵 모자를 쓰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아내가 붕어빵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며 즐거워하는 모습, 연우와 연솔이가 각자의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야무지게 먹는 모습에서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느껴졌습니다. 연서와 함께 한입 베어 문 붕어빵 아이스크림 사진을 찍었습니다. 연솔이는 아이스크림을 얼굴에 잔뜩 묻히면서도 행복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놓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여행은 이렇게 거창한 계획 없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작은 즐거움을 발견하는 묘미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그 증거였습니다.
여행의 서막과 끝: 보이지 않는 노력들
집에서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되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과 준비가 숨어있습니다. 여행 전, 아내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연서가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다 보니,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항공사 및 공항에 사전 허가를 받아야 했죠. 연서의 이동용 산소호흡기 관련 서류를 떼고, 기기의 시리얼 넘버를 확인하며, 의사로부터 여행 가능 확인서를 받아 제출하는 일련의 과정이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공항에서 연서가 어떤 절차로 이동하게 될지도 미리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구요.
그리고 짐 싸기. 아내 본인은 물론, 연우, 연서, 연솔이의 짐을 싸는 일은 매번 산더미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연령대가 모두 다르고, 특히 연서는 시간대별로 복용해야 할 의약품이 많았습니다. 다른 것들은 현지조달이 가능할지 몰라도 연서 의약품들은 그렇지 않다보니 신경이 꽤 쓰이는 일입니다. 연솔이의 먹거리까지 챙겨야 하다 보니, 아무리 꼼꼼한 아내라도 그 많은 물건들을 다 챙기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짐은 늘 한가득이었죠.
제 역할은 주로 여행 계획과 짐 운반이었습니다. 항공권, 숙박, 식당 등 각종 예약은 물론, 현지에서 연서를 포함한 가족들이 어떻게 이동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습니다. 연서가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고, 위루관으로 유동식을 먹어야 했기에, 적절한 타이밍을 고려한 시간대별 계획을 짜는 것은 필수였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은 짐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연서 유모차, 할머니 몫을 포함한 트렁크 다섯 개, 그 외 핸드캐리용 가방 세 개. 이 짐들을 일단 차에 싣는 것부터 고난의 시작이었죠. 공항에 내려 짐을 부치기 전까지의 이동, 목적지 공항에서 짐을 찾고 호텔까지 가는 택시 이동, 택시에서 내려 호텔 라운지로 이동하는 모든 과정이 주로 저의 몫이었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 모든 과정을 역순으로 반복해야 했습니다.
흔들리는 비행기 안, 가족의 연대
돌아오는 비행기 안, 제 마음은 또다시 조마조마했습니다. 연서가 6시간 비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산소 포화도는 괜찮을지, 돌발 상황은 없을지 노심초사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정해진 타이밍에 맞춰 약을 먹이고 유동식을 먹여야 했으니,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연솔이도 6시간 비행은 처음이라 많이 떼쓰지 않고 잘 있어 줄지 걱정이었죠. 다행히 가는 비행기에서는 상정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예상보다 꽤 별일 없이 무사히 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터졌습니다. 이런, 연서의 휴대용 석션기(Suction machine)가 고장 난 것이었습니다. 산소호흡기가 있기는 해도, 높은 상공에서는 호흡이 평소보다 어려워 산소 포화도가 약간 낮게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가래가 쌓이면서 포화도가 조금 더 낮아졌지요. 설상가상으로 연서가 큰일을 보았습니다. 연서가 응아를 할 때면 몸에 힘을 주면서 약간의 경기 반응이 동반되고, 이때 포화도가 더 낮아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급하게 아이를 안고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연서가 이제 8살이라 몸집이 제법 큰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좁은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 기저귀 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6시간이 언제 지나갈까, 체감하는 시간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맘을 졸이며 간신히 기저귀를 갈고 나니, 연서는 힘이 빠졌는지 잠이 들려는 듯했습니다.
천만다행히 큰 탈 없이 무사히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연서의 등을 몇 번 더 두드려주고, 일단 서둘러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석션기로 가래를 뽑아주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아이를 재울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길고 길었던 비행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무리해서라도, 함께 쌓는 기억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리해서라도 이렇게 여행을 갈 수 있는 건 오롯이 아내 덕분이었습니다. 여행에 대한 아내와 나의 가치관은 놀랍도록 닿아있었고, 우리는 먼저 연서에게 해외여행을 포함해 단 하나의 경험이라도 더 시켜주고 싶었습니다. 혹시 아나요. 낯선 풍경과 새로운 자극이 연서의 뇌를 깨우는 데 작은 도움이 될지. 그리고 연서가 있음으로 인해 연우와 연솔이가 세상의 다양한 경험들을 놓치지 않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연서가 있으면 아무래도 품이 많이 들고, 여러 제약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혼자 갈 때보다 둘이 갈 때 불편하고, 둘보다 셋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이 더 좋으니까 가는 것이 아닐런지요. 다소의 불편함쯤은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가족이 새로운 경험을 하고 그 속에서 함께 웃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여행을 다녀오면 몸은 파김치가 되기 일쑤죠. 하지만 그 장소에서 느꼈던 행복한 기분, 그 순간의 환희와 사랑은 몸의 피로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행복한 기억들, ‘그때 그 느낌이 있었지’ 하는 아련한 추억은 다시 삶을 살아가는 든든한 힘이 되어줍니다. 여행은 우리에게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더 단단하게 뭉치게 하는 마법 같은 시간의 기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