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그랜트(Adam Grant)는 그의 저서 『Think Again』에서 “지능이 생각하는 능력이라면, 지혜는 다시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한 번 내린 결론이나 믿음을 고수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지만, 진정한 성장은 과거의 확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깨닫고 기꺼이 새로운 지도를 그려 나갈 때 시작됩니다. 삶이라는 변화무쌍한 강물 위에서 ‘다시 생각하기’는 단순한 변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가장 지혜로운 전략입니다.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행복 지도를 가지고 인생을 출발하지만, 거친 풍랑을 만났을 때 그 지도가 쓸모없어졌음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지도를 과감히 접고 현재의 좌표를 다시 읽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Rethink’는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하려는 용기 있는 도전입니다.
이제 나는 내가 그토록 견고하다고 믿었던 행복의 정의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연서가 태어나기 전 우리가 누렸던 행복은 책의 앞부분에서 고백했듯 마치 ‘탄산음료’와 같았습니다. 캔을 따는 순간 터져 나오던 그 찰나의 청량함, 와인 잔을 기울이며 속삭이던 평온함, 그리고 벚꽃 터널 아래서 느꼈던 무구한 설렘들 말입니다. 그때의 우리는 건강과 안정이라는 조건이 갖춰지기만 하면 행복은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쾌락적 행복’은 다가올 폭풍 앞에선 너무나 연약한, 운 좋게 얻어진 선물이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우리 집의 아침엔 더 이상 정적이 없습니다. 첫째 연우의 등교 인사와 둘째 연서의 위루관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분주한 손길, 집안을 휘젓는 막내 연솔이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메웁니다. 식탁 위에 흩어진 시리얼 조각들과 거실 바닥의 인형들 속에서 나는 깨닫습니다. 행복은 박제된 정물이 아니라,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동사라는 것을요. 때로 마음속에서 “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라는 비난이 들려올 때면, 피오나 로바즈의 조언처럼 “지금까지는 그랬지”라는 전제를 붙여봅니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지.’ 이 짧은 한마디는 실패를 영구적인 상태가 아닌 ‘지나간 과거’로 밀어내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때로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옥죄어 오지만, 그 안에서 기어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제리 롱이라는 청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리 롱은 3년 전에 다이빙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목 아래 부분이 마비되었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는 17살이었다. 요즘 롱은 입에 막대를 물고 타이프를 친다. 그는 특수하게 고안된 전화기를 통해 지역사회 대학에서 제공하는 강좌를 두 개 듣고 있다. 인터콤이 롱에게 강의를 듣고 교실에서 하는 토론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밖에 그는 독서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리 롱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삶이 의미와 목표가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의 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삶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나는 내 목을 부러뜨렸지만, 내 목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에서 처음으로 심리학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장애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내 능력을 더욱 향상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도달한 인간적인 성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말이 곧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연서와 함께하는 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여정 속에서, 제리 롱처럼 ‘무너지지 않는 법’을 매일 연습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에디트 에바 에거는 응석받이로 자라 “자신을 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과잉보호하는 대신, 연서라는 특별한 존재와 함께 부대끼며 역경 속에서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연우는 동생의 속도를 기다려주며 세상을 깊게 응시할 줄 아는 단단한 아이로 성장했고, 막내 연솔이는 존재 자체로 우리 모두에게 생명력을 수혈합니다.
우리 가족에 있어 이러한 변화를 에드윈 애벗의 소설 『플랫랜드(Flatland)』에 담긴 차원의 확장에 비유해봅니다.
소설 『플랫랜드』에는 선으로 이루어진 세계인 라인랜드와 면으로 이루어진 플랫랜드가 등장하는데, ‘정사각형(Square)’이 화자로서 글을 전개해나갑니다. 정사각형은 플랫랜드를 벗어나 모든 것이 선으로 구성된 ‘라인랜드’에서 저차원의 시선을 경험합니다. 라인랜드에서는 모든 선과 점이 하나의 직선 위를 오갑니다. 라인랜드의 직선 위를 오가는 주인공 정사각형은 하나의 점으로 비쳐집니다. 2차원 공간을 설명하려는 정사각형의 노력은 완전히… 실패합니다.
이어서 정사각형은 자신이 3차원 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방인 ‘구(Sphere)’를 만나는데, 원처럼 생긴 그는 묘하게도 시선의 위치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 보입니다. 라인랜드 거주민들이 선 밖으로 움직이는 동작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듯 정사각형 역시 ‘북쪽이 아닌 위쪽’이라는 이방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느낀 구는 몸으로 직접 3차원을 설명합니다. 구는 정사각형을 거의 벗겨내듯 세계에서 끌어내 플랫랜드에서 그를 탈출시킨 후 3차원 공간으로 데려갑니다. 새로운 세상과 관점을 경험하며 정사각형은 외쳤습니다. “추론하지 않고도 이제 실제로 볼 수 있군요.”
미지의 문이 열리자 수많은 가능성이 쏟아져 들어왔고, 제자 정사각형은 주저 없이 3차원 이상의 차원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는 고체의 내부를 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소!” 스승인 구는 격분하며 대답했습니다. 정사각형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구가 그랬던 것처럼 유추를 통한 사고 실험을 지속해나갔습니다. 1차원에서 두 점을 이으면 선이 됩니다. 2차원에서 각각의 선을 이으면 정사각형이 됩니다. 이를 3차원 공간으로 옮기면 정육면체가 됩니다. 그렇다면 정육면체를 4차원으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3차원 밖의 이 공간은 바로 ‘생각의 나라’입니다.”
예전의 우리가 2차원의 ‘플랫랜드’에서 벚꽃 여행이나 휴양지의 안락함 같은 단편적인 행복만을 쫓았다면, 연서는 우리를 그 평면 밖으로 거칠게 끌어내 3차원의 공간을 목격하게 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은 이제 슬픔과 기쁨, 고통과 성취가 입체적으로 얽힌 4차원의 ‘생각의 나라’로 진화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상처가 없는 무결한 상태가 아닙니다. 상처라는 거친 바탕 위에 더 화려하고 희망적인 색칠을 덧입혀가는 치열한 과정입니다. 연서의 느린 걸음은 우리에게 ‘함께 걷는 기쁨’을 가르쳐주었고, 연솔이의 쉼 없는 발걸음은 우리에게 ‘지치지 않는 생명력’을 증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금요일 밤 와인 잔을 기울이던 고요한 신혼의 밤보다, 세 아이가 뒤엉켜 잠든 침대 곁에서 들려오는 저마다의 숨소리에 더 깊은 충만함을 느낍니다. 멀리 여행을 떠나지 못해도, 거실 창가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 아래서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터뜨리는 포복절도의 웃음 속에서 기쁨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운 좋게 얻어진 평온이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일구어낸 ‘발견된 희망’입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오지만, 우리는 이제 그 파도를 타고 넘는 서핑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바다는 어제보다 오늘 더 눈부시게 푸르고 역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