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어느 토요일, 그리고 책 읽는 아이로 키우기

by 이병일

삶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 속 어머니의 대사처럼,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무엇을 집게 될지 알 수 없는 ‘초콜릿 상자’와 같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때때로 시련이라는 씁쓸한 다크 초콜릿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기쁨을 선사하기도 하죠.


이 장에서는 우리 가족이 그 인생의 상자 안에서 찾아낸, 소박하지만 가장 단단한 행복 중 하나인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특별할 것 없는 어느 토요일 오후의 풍경, 그리고 책을 통해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제가 발견한 삶의 지혜와 따뜻한 단상들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가 책이라는 또 다른 상자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 아이와 부모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토요일 오후의 작은 순례: 도서관 가는 길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토요일에 저와 첫째 연우, 그리고 막내 연솔이가 함께 광진정보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오후 3시에서 4시쯤,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는 시간, 우리는 집을 나섭니다. 스마트폰으로 마을버스 도착 시간을 확인하고 그 박자에 맞춰 걸음을 재촉합니다. 어느덧 연솔이는 자기 허리만큼 오는 마을버스 계단을 혼자서도 힘차게 올라갑니다. 엉덩이가 들썩이는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을 구경하며 10분 남짓, 도서관에 도착합니다.


처음에는 한두 번 가벼운 마음으로 와봤습니다. 물론 둘째 연서가 있기에 아내가 두어 시간이나마 숨 돌릴 틈을 주려는 목적도 있었고, 연우처럼 연솔이도 책을 좋아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도서관 나들이는 어느덧 토요일의 소중한 루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버스에서 입었던 옷들을 돌이켜보니, 따뜻한 봄날의 얇은 외투부터 땀을 식혀주던 여름옷, 그리고 포근한 겨울 코트까지 사계절 옷차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니, 이 루틴이 시작된 지도 1년이 훌쩍 넘은 것 같습니다.


이제 연우는 알아서 4층으로 올라가 청소년 도서 코너로 향합니다. 작년에만 해도 제가 책을 골라주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역사책부터 SF, 심지어는 심리학 개론서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을 능숙하게 골라옵니다. 그러는 사이 저는 연솔이와 2층에 있는 영유아 도서 코너로 갑니다. 영유아 독서 공간은 가로 5m, 세로 5m 정도 될까요? 알록달록한 책장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고, 아이들이 바닥에 편하게 앉아 책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신이 나서 짐을 던져놓고는 가장 좋아하는 책들을 가져옵니다. 최근에는 바바가족 시리즈나 로보카 폴리 시리즈를 특히 좋아합니다. 가끔은 좀 더 감성을 키워줄 수 있는 따뜻한 단편들을 찾아 읽어주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플란다스의 개, 이솝 우화를 재밌게 보더군요. 집에도 꽤 많은 책이 있긴 하지만, 역시 도서관에 오면 다양성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이 좋습니다.


그렇게 바닥에 앉아서, 주로 연솔이는 제 무릎에 앉아 저와 함께 책 속으로 빠져듭니다. 햇살이 창가를 넘어 길게 쏟아져 들어오는 도서관 복도. 그 따뜻한 빛 아래, 연우는 저만치 떨어진 서가 옆 바닥에 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고, 저는 연솔이를 무릎에 앉힌 채 그림책의 활자를 따라 읽어 내려갑니다. 연솔이의 작은 머리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있고, 작은 손가락은 그림 속 코끼리의 길쭉한 코를 짚으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듯 제 얼굴을 올려다봅니다. 맑고 초롱초롱한 눈망울 속에는 책 속 세상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때때로 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옹알거리듯 따라 읽는 아이의 모습은, 저의 지친 하루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이 됩니다. 연우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입니다. 한 번에 열 권 넘는 책들을 이렇게 읽어주다 보면 때로 목이 아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 느낌, 그리고 때로 지친 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떠오르는 이 장면은 제 마음의 한 켠을 든든하게 채워줍니다.


그렇게 1시간에서 1시간 반 남짓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6시가 됩니다. 이 시간이 되면 연솔이의 배꼽시계가 어김없이 작동합니다. 책 읽을 땐 괜찮다가 집에 가자고 하면 갑자기 배가 고프다고 간장치즈밥을 달라고 조릅니다. 조건반사일까요. 도서관에 왔다가 집에 갈 때면 늘 그 메뉴를 찾네요.


부모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아이의 정서 발달과 유대감 형성, 그리고 언어 능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미국 소아과학회(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는 유아기부터 부모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뇌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특히 아이의 어휘력과 독해력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책을 읽어주는 이러한 상호작용은 부모와 아이 간의 긍정적인 애착을 형성하여 아이의 정서적 안정감과 사회성 발달에도 기여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아이와 함께 책 속으로 떠나는 우리 가족의 이 작은 순례는, 우리 가족의 마음의 지도를 더욱 풍요롭게 채워주고 있습니다.


책 읽는 아이, 책 읽는 어른: 세대 간의 공감

연우는 책을 참 좋아합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어릴 때 집에 잘 붙어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밖에 나가 축구, 야구 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죠. 그러다 보니 책을 많이 읽지는 않은 편입니다. 오히려 성인이 된 이후에 책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제 취향은 대부분 비문학입니다. 행동경제학이나 긍정심리학 책들을 특히 좋아하고, 경제경영, 역사에 대한 책도 즐겨 읽습니다. 가끔은 우주물리학 관련 책들도 흥미롭게 들여다봅니다. 각 분야에 대한 조예가 깊진 않지만, 새로운 지식을 탐색하는 과정 자체를 좋아합니다.


아내는 어릴 때 저와는 사뭇 다른 성향이었습니다.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는 집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문학책들을 참 많이 보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연우는 문학책을 조금 더 선호하는 듯 보입니다만, 비문학을 읽는 데에도 흥미를 느끼는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문학책에 대해서는 아내의 섬세한 가이드가 있고, 아내가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을 연우가 읽으며 “엄마도 어릴 때 그거 읽었다”는 공감이 형성되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연우와는 다양한 장르의 책을 함께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부터는 비룡소나 네버랜드 클래식에서 나온 고전들을 많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비밀의 화원』, 『소공녀』, 『꿀벌 마야의 모험』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부터 『메리 포핀스』시리즈까지, 연우의 독서 목록은 점점 풍성해졌습니다. 특히 네버랜드 클래식 중에서는 『제인 에어』를 가장 좋아하더군요. 저는 주로 연우가 어떤 책에 관심을 보이는지 관찰하고, 그다음에는 어느 정도 수준의 책을 권하는 것이 좋을지 조용히 지켜보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연우는 책의 내용도 좋아하지만, 글을 읽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점점 페이지 수나 글의 수준을 높여가도 거부감 없이 새로운 지식과 이야기를 흡수하는 모습이 참 대견했습니다.


최근에는 『사피엔스』, 『설득의 심리학』, 『팩트풀니스』,『조선왕조실록』 같은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코스모스』보다는 『사피엔스』가 본인에게 더 맞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취향이 형성되어 가나봅니다. 물론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글을 읽고, 생각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아이로 커가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독서는 아이가 장차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훈련’을 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줍니다. 제현주 작가는 저서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에서 “자신이 왜 열정을 쏟는지, 그 욕망이 정말 내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스스로 ‘나의 일’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참 공감이 가는 얘기였습니다. 아이들이 책 속의 다양한 삶과 가치관을 만나는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미래를 상상해볼 기회를 갖는 일입니다. 스물몇 살이 되어 갑자기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강요를 받기 전에, 책을 읽으며 내 안의 욕망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연습을 미리 시작하는 셈입니다.


책, 아이를 키우는 보이지 않는 손: 넛지의 힘

연우가 책을 이토록 좋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타고난 성향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호기심 많고 차분한 아이의 기질이 책과 잘 맞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지 못할 때부터 엄마와 아빠가 끊임없이 책을 많이 읽어준 영향도 지대할 것입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넘어, 책과 독서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과 인식을 심어주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넛지(Nudge)’라고 할 만한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넛지란 ‘옆구리를 슬쩍 찌르다’는 뜻처럼, 강요하지 않고 부드러운 개입을 통해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는 엄마, 아빠, 연우 각자가 하루에 할 일을 체크리스트로 만들어 벽에 붙여놓고, 일을 마칠 때마다 스티커를 붙이는 소박한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책 읽기’ 항목을 추가했고, 아이는 스티커를 붙이는 재미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책을 집어 들곤 했습니다.


저는 알라딘 중고서점, 그리고 잠실에 있는 ‘서울책보고’를 참 좋아했는데, 틈나는 대로 셋이 함께 가서 한 권 한 권 들여다보며 책을 골라서 사주었습니다. 이때는 특정 전집을 사주기보다는, 연우의 관심사와 연령에 맞춰 어떤 책이 좋을지 함께 고민하면서 다양한 스타일의 책을 한 권 한 권 골라주었습니다. 그림책부터 동화, 심지어는 제가 읽던 비문학 책 중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골라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연우가 다양한 장르와 문체의 책을 좋아하고 편견 없이 독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넛지 이론의 창시자인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와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은 그들의 저서 <넛지>에서, 작은 환경적 변화가 사람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환경을 조성하고, 긍정적인 독서 경험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아이가 독서를 즐거운 행위로 인식하고 스스로 책을 찾게 만드는 효과적인 넛지가 됩니다. 집안 곳곳에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부모가 먼저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강력한 넛지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모방하며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저는 앤젤라 더크워스의 『그릿(GRIT)』에 담긴 조언을 떠올립니다. 그녀는 “관심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 계기가 되어 흥미가 생긴다”고 강조합니다. 아이가 처음 어떤 분야에 관심을 보였을 때, 그 일을 계속 경험함으로써 거듭 흥미를 유발하도록 돕는 것이 어른의 역할입니다. 관심은 부모, 교사, 또래 등 지지자들의 격려가 있을 때 점점 깊어집니다. 연우가 책을 통해 발견한 파편 같은 관심사들이 사장되지 않도록, 적절한 자극과 정보를 계속 제공해주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건네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 행복감과 자신감을 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독서, 삶의 풍요로운 에너지원

저는 아이들이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미 연우는 저보다 책을 많이 읽고 있긴 합니다만. 독서는 그 자체로도 좋은 취미이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을 위시한 다양한 매체에 무의미하게 시간을 쓰기보다는, 독서가 그 시간을 차지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책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를 넘어, 우리의 마음을 살찌우고 삶의 지혜를 선물합니다. 책 중반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서는 제가 스스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복잡한 생각 속에서 잠시 벗어나 쉼을 주기도 했습니다. 책 속에서 만난 긍정적인 메시지들을 곱씹으며 우리 가정의 평화와 행복에 적용하려는 행동을 하게 하기도 했죠. 때로는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탈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책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고 실천해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언젠가 이 지면을 할애해서 더 깊이 있는 생각들을 나눌 기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분명한 것은, 책은 우리 아이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단단하게 만들어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작은 씨앗이 자라나 아이들의 마음속에 울창한 숲을 이루기를, 그리고 그 숲 속에서 아이들이 언제나 평화와 지혜를 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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