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퍼머컬처-자연과 사람을 잇는 디자인

3. 흙으로 잇는 치유는 공간-용인 PCC 실험 텃밭

by 조영빈

3. 흙으로 짓는 치유의 공간 ― 나의 첫 번째 PCC, 용인 실험실

철학은 땅에 뿌리내릴 때 비로소 생명이 된다.

‘퍼머컬처 커뮤니티 케어팜’ 또한 그랬다. 나는 거창한 부지를 찾기보다, 내가 살고 있는 용인의 작은 집과 텃밭을 첫 번째 실험실로 삼기로 했다. 이곳에서 이론이 현실이 되고, 비전이 삶으로 증명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의 몸이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되다

암 수술 이후의 회복 기간 동안, 나는 퍼머컬처 커뮤니티 케어팜의 첫 번째 수혜자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직접 흙을 만지며 치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이의 치유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내 몸과 마음, 병과 회복, 일상과 돌봄의 모든 과정을 가장 진실한 실험 데이터로 삼았다. 그 결과, 나의 집은 단순한 주거공간을 넘어 삶이 치유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치유농장’이 되었다.

아침마다 맨발로 밟던 잔디밭은 몸의 감각을 깨우는 ‘어싱(earthing) 힐링 공간’이 되었고, 직접 가꾼 작은 텃밭은 몸을 살리는 음식을 길러내는 ‘움직이는 약국’이 되었다. 한여름 땀을 흘리며 잡초를 맸던 시간은 불안을 다스리는 노동 명상이 되었고, 가을 밭에 심은 배추 모종은 다음 계절의 희망을 심는 관계의 의식이었다. 이 모든 순간이 내 몸의 회복과 하나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을 치유일지로 기록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그린 꿈의 청사진

이 작은 실험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치유농업에 뜻을 함께한 동료들과 함께 만든 ‘연구모임’이 나의 집을 더욱 풍성한 실험실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더 이상 책상 앞에 앉아 이론을 논하지 않았다. 삽을 들고, 손으로 흙을 만지고, 퍼머컬처의 원리를 텃밭 위에 직접 구현했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나선형 허브정원(spiral herb bed)을 만들고, 주방의 음식물 쓰레기를 거름으로 돌려보내는 키홀텃밭(keyhole garden)을 설계했다. 또, 휠체어를 탄 어르신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흙을 만질 수 있는 상자텃밭(box garden)을 디자인하며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의 의미를 새롭게 배웠다.

봄의 설렘, 여름의 땀, 가을의 성찰, 겨울의 기다림— 그 모든 계절의 이야기가 ‘치유정원일기’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내 개인의 회복기가 아니라, 함께 치유의 언어를 만들어간 공동체의 서사였다.


퍼머컬처의 다섯 구역 ― 작은 정원에 담긴 삶의 지도

퍼머컬처는 공간을 단순히 기능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삶의 흐름과 관계의 깊이가 담겨 있다. 내가 살던 용인의 집을 실험실로 삼았을 때, 그 작은 정원과 텃밭은 어느새 퍼머컬처의 다섯 구역(Zone 0~5)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Zone 0 — 집, ‘스토리 카페’이자 ‘작은 공부방’

이곳은 모든 실험의 심장이자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다. 주방의 작은 테이블 위에는 언제나 허브차 향이 감돌았고, 그 옆에는 우리가 함께 읽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이곳에서 동료들과 마주 앉아

“다음 디자인은 어떻게 바꿔볼까?”

“오늘 흙의 수분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아.”

이런 대화가 오갔다. 커피 한 잔,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나눈 이야기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관찰과 사색의 연장선이었다. 서로의 일상과 회복, 그리고 철학을 나누는 ‘스토리 카페’였고, 새로운 실험이 구체화되는 ‘작은 공부방’이었다. 이곳에서 흘러나온 대화가, 정원 전체를 움직이는 첫 번째 에너지의 순환이 되었다.


Zone 1 — 공감의 정원, 관계가 자라는 실험터

집 앞의 마당은 언제나 생명으로 가득했다. 나선형으로 설계된 허브정원은 향기와 색이 계절마다 달라지는 하나의 풍경화였다. 라벤더와 로즈마리, 타임이 바람에 스치며 내는 향기는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천연 아로마였다.

그 옆의 키홀텃밭은 우리의 순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주방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가 퇴비가 되어 다시 작물을 길러내는 순환의 구조— ‘버림이 자원이 된다’는 깨달음이 바로 그 자리에서 태어났다.

또 하나의 실험은 상자텃밭이었다. 허리를 굽히기 어려운 어르신들도,휠체어를 탄 이들도 손쉽게 흙을 만질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곳에서 모두가 함께 모종을 심고 잡초를 뽑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순간 정원은 더 이상 나의 공간이 아니라 공감이 자라는 마당이 되었다.


Zones 2 & 3 — 공유의 들판, 나눔이 열매 맺는 곳

조금 더 안쪽에는 과일나무와 채소밭이 이어졌다. 사과나무 아래에는 당근과 상추, 방울토마토가 자라며 사계절의 변화를 알려주었다. 수확의 시기가 오면 그 결실은 자연스레 이웃과 동료들에게 흘러갔다. 누군가는 직접 밭일을 도왔고, 누군가는 텃밭의 채소로 밥상을 차렸다. 이 과정에서 농사는 소유의 행위가 아니라 순환의 행위임을 배웠다.

Zone 2와 3은 그렇게 ‘혼자 먹는 밭’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들판’이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땅의 풍요로움이 결국 관계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Zones 4 & 5 — 침묵의 숲, 나를 만나는 길

정원의 가장자리,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작은 산책길이 있었다. 새벽마다 맨발로 그 길을 걸으며 나는 하루의 숨을 고르고, 마음을 비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소리, 풀잎에 맺힌 이슬,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흙의 감촉이 묵상과 명상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 이곳은 누구의 간섭도, 말소리도 없는 침묵의 숲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생명의 언어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 사이에서 나는 “치유는 결국 자연의 리듬으로 돌아가는 일”임을 배웠다.

작은 집 한 채, 작은 정원 하나였지만 그 안에는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 몸과 철학이 서로 연결된 삶의 생태계가 있었다.

Zone 0에서 피어난 대화가 Zone 1의 실험으로 이어지고, Zone 2·3의 나눔이 Zone 4·5의 고요 속에서 숙성되었다. 이 순환은 하나의 디자인이자, 하나의 삶이었다. 이 용인의 작은 정원이 바로, 내가 꿈꾸는 가평 치유농장의 축소판이자 예고편, 그리고 “치유의 철학이 현실이 된 첫 번째 무대”였다.


내 꿈의 청사진을 찾다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 몸의 자연 치유력을 경험했던 나는, 퍼머컬처를 만나면서 그 동일한 원리가 땅과 공동체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자연이 스스로를 치유하며 더욱 풍요로워지는 퍼머컬처의 지혜는 나의 개인적 회복 경험을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공유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이제 나의 회복은 더 이상 나만의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모든 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약속이 되었다. 퍼머컬처는 내 삶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경험과 철학을 하나의 실천 가능한 형태로 꿰어 준 마지막 황금 실(실마리)이었다.

그 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용인의 작은 정원에서 가평의 큰 숲으로, 한 개인의 회복에서 한 공동체의 재생으로. 그것이 내가 꿈꾸는 치유농장의 길이며, 삶이 나에게 내준 가장 아름다운 청사진이다.


글쓴이 주: 이러한 꿈은 가평 제 고향에 가평 GCC(Green Care Community) 협동조합이란 이름으로 내년 1월 출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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