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럼틀에서 미끄러져 내려온다. 조그만 나무 미끄럼틀이 미술학원 한 모퉁이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미끄럼틀 끝에 앉은 채로 멀뚱멀뚱 학원 안을 둘러봤다. 6~7살에서 많아야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널찍한 테이블에 앉아 저마다의 그림을 그리느라 열심히다. 고개 숙이고 스케치북에 집중한 탓인지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를 따라간 것인지 엄마가 갓 생긴 미술학원 체험 삼아 들여보낸 것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6살 때의 일이었다. 그 작은 미술학원은 내가 처음으로 소속되고픈 공간이었지만 엄마는 내가 7살이 되면 동네에 새로 생긴 사립유치원에 큰 맘먹고 보낼 생각이었던 터라 그 날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술학원을 가 본 날이 되었다.
어릴 적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글을 배워 표현하기 전에 먼저 배우는 것이 그림이다. 유치원에서 미술활동을 많이 시키기도 하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표현해 낸다는 기쁨이 있었다. 그즈음에 무한 반복하여 그려내던 드레스 입은 공주들에 만족 못해서 엄마를 졸라 서툰 솜씨로 공주를 그려내게도 했었다. 특출 나게 다른 아이들보다 잘 그려서 칭찬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다만 내가 그리는 행위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내 다음 기억은 국민학교 4학년 때로 간다. 그 날은 학교에서 미술 실습이 있는 날이었다. 주제는 책 겉표지 만들기였다. 앞, 뒤표지, 측면까지 그려내는 작업이었는데, 가상의 책을 만들어 표지를 디자인하는 친구도 있었고, 실제 가지고 있는 책을 보고 그려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전날 준비물로 챙겨놓은 디즈니 명작 전집에서 ‘백설공주’를 그려볼 참이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사과를 들고 있는 마녀까지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밑그림을 그리고, 포스터물감으로 색칠을 했다. 물감 쓰는 것을 따로 배워본 적도 없었던 나는 그냥 내 느낌으로 그리고 있었다. 크지 않은 8절 스케치북에 작은 그림을 뭉툭한 붓으로 덧칠해가며 간신히 그려냈다. 시간이 부족해서 뒤표지 쪽은 미완성이었지만, 결과물은 꽤 만족스러웠다. 내 눈에만 그리보인 것은 아니었는지 옆 친구들이 잘 그렸다 하는 소리에 궁금해진 반 아이들이 한 번씩 다 구경하고 갔다. 그 날은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토요일 오전 수업 후 퇴근하신 아빠가 거실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계셨다. 보통의 날과 같았다면 오늘 그린 그림은 엄마에게만 들고 가 보였을 텐데 그날은 왠지 아빠에게도 보이고 싶었다.오늘 학교에서 그린 그림이라며 아빠 앞에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잠시 그림을 보던 아빠는 스케치북을 돌려주며 한 마디 툭 던지셨다.
“보고 따라 그린 거구만. 따라 그리는 거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려야지.”
끝까지 아빠는 내가 원하던 한마디 ”잘 그렸네.”를 해 주지 않으셨다. 지금이라면 창의력은 모방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큰소리쳤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대로 풀이 죽어버렸다. 그 후로는 아빠에게 내 그림을 한 번도 보여드리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아빠에게 드러내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려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고, 그 날 내가 그린 그림은 적어도 반에서 훌륭하다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아빠에게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술학원도 다녀보고팠던 나는 그림을 정식으로 학원에서 배울 수는 없겠구나라고 무의식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는 뜸하긴 했어도 뭔가를 그리는 것을 멈추진 않았고, 고등학교에 가선 만화동아리까지 들어가 아빠 몰래 숨어 그렸다.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그렸던 그림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숨어 그렸다고 그림을 꽁꽁 숨겨놓지도 않았고, 청소하면서 내 책상을 치워주시던 엄마는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분 사이에 비밀이 없으셨기에 물론 아빠도 알고 계셨을 것 같다. 비평준화지역이라 고입과 대입을 치러야 했던 그 치열했던 시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 모른 척해준 것은 아빠가 끝내 칭찬하지 않으셨던 이유와 같을 것이다. 칭찬했다가 내가 행여나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 어쩌나라는 두려움과 혼자서 이 정도로 그린다는 기특함의 공존. 나 또한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아빠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반 친구를 과외하며 공부했던 아빠를 삶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간절히 딸의 안정적인 삶을 바라는 아빠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빠의 소심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는 그림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린다는 행위가 좋았을 뿐 업으로 삼아 나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치열했던 삶에 밀려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낙서조차 그림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내가 아이를 낳고서는 아이를 위한 그림을 그려주었다. 엄마가 곧잘 따라 그려내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아이는 엄연히 그림책에 있는 그림을 또 그려내라는 주문을 했다. 그리고 요즘은 덩치가 나만해진 큰아이와 나는 각자의 그림을 매일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