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비행기 사고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의 상황은 참사 그 자체였다. 우선 당시 맨유의 감독인 맷 버스비는 뮌헨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중상을 입어 감독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지미 머피 코치가 대리로 감독직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많은 주축 선수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으로 은퇴하여 팀 전체적인 전력 누출이 매우 심하였다. 따라서 맨유는 어쩔 수 없이 남은 1군 선수들과 2군 선수들(유스팀 선수들)을 활용하여 잔여 경기에 임하게 된다.
당시 사고 이후 맨유가 맞이하는 첫 경기는 볼튼 원더러스 와의 fa컵 결승전이었는데, 결과는 당시의 예상과 같이 맨유의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였다. 맨유는 이후 리그 잔여 경기들에서도 단 1승 만을 거두게 되며, 암흑기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당시 맨유의 상황에 대해서 현지 언론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비행기 사고 이후 제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바라보았으며, 비행기 사고 이전의 맨유로 돌아오기는커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클럽이 존속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까지 예상하였다.
그러나, 맷 버스비는 무너져 가는 맨유를 그냥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서 두 번의 사망 선고를 듣고도 생사의 고비를 극복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복귀한다. 그가 맨유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했던 것들은 그가 부임 이후 가장 먼저 한 어린 유망주 선수들의 발굴과 세계 각국에서 뛰는 다양한 선수들의 영입이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팀이 우리가 흔히 아는 버스비의 아이들(Busby's babe)이다.
영광의 시작.. 또 한 번의 리빌딩(Re - building)
그는 감독직을 복귀한 뒤로 비행기 참사 사건에서 생존한 바비 찰튼, 데니스 바이올렛, 폴 빌크스 등을 주축으로 전 세계로 스카우터를 파견하면서 나이가 어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발굴하는데 노력을 쏟아부었다.
우선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데니스로(Dennis Law)의 재능을 알아보고 영입하였으며,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유망주인 조지 베스트(George best)를 1군으로 졸업하여 데니스로 - 바비 찰튼 - 조지 베스트라는 당시 무적의 공격 삼각 편대를 구축하게 된다. 미드필더진과 수비진 또한 새로 개편하면서 맷 버스비 아래의 맨유는 암흑기에서 탈출하려는 발버동을 치고 있었다.
맨유는 리빌딩 이후 조지 베스트 -바비 찰튼- 데니스 록으로 이루어진 삼각편대를 필두로 엄청난 화력을 선보였다. 1963-64 시즌 데니스로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 46골을 넣는 기염을 토했으며, 바비 찰튼과 조지 베스트 또한 절정의 경기력을 선보이면서 세명의 선수가 1963-64 시즌 총 71골을 기록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리그 2위로 이끌었다.
그리고 1964-65 시즌에도 맨유의 발전은 이어졌고, 이 세명의 삼각편대는 여전히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하였다. 당시 맨유는 리즈와 공동 1등을 기록하였으나, 골득실차 우위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비행기 참사 사건 이후 약 7년 만의 우승이며, 당시 맨유의 리그 우승은 그들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며, 다시 한번 세계 최고 클럽으로 도약하는 발돋움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대망의 1966-67 시즌, 그들은 비행기 참사 이후 약 10년 만에 유러피언 컵을 거머쥐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클럽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사실 이 시즌에서 맨유는 유러피언 컵 성적을 제외하면 비교적 안 좋은 시즌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맨유는 유러피언 컵 성적을 제외하고 지난 시즌 리그 4위, fa 컵 탈락이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멧 버스비 또한 당시 은퇴를 생각할 정도로 팀 전체가 부진과 함께 좋지 않은 라커룸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맷 버스비는 다시 한번 포기하지 않고 선수들을 격려하여 남은 유러피언 컵 일정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러피언 컵 결승전 상대인 벤피카를 4대 1로 물리치며 유러피언컵에 우승하게 된다.
비행기 참사 이후 약 8년 만의 리그 우승, 그리고 10년 만의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면서 유럽과 잉글랜드 전역에 맨유의 부활을 알린 맷 버스비는 1968-69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한다. 맷 버스비는 당시 그의 감독직 은퇴가 감독직을 넘어서 이사직으로서 맨유라는 클럽에 대하여 더 많은 권한을 얻고자 함으로 맨유를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소년 시스템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와 유소년 팀과 맨유 1군 팀 간의 조직적인 연결망 형성과 그 외 다양한 방식으로 맨유에 기여하려 하였던 것이다.
맷 버스비는 맨유 감독직의 후임으로 윌프 맥기네스를 선임하는데, 그는 버스비 아이들의 일원으로 누구보다 맷 버스비의 팀 운영방식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지만, 맷 버스비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맷 버스비 감독이 사임하면서 맨유의 선수들은 급격하게 조직력이 와해되었고, 축구에 대한 열정을 잃어갔다. 그리고 윌프 멕 기네스 감독 또한 이러한 선수들을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과적으로 맨유는 맷 버스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리그 8위와 fa컵 준결승 탈락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긴다. 또한 다음 시즌에서는 시즌 도중 19위를 기록하면서 맥기네스 감독은 사임하게 된다. 그렇게 맨유는 맷 버스비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감독들을 선임하였으나, 과거 맷 버스비의 맨유를 재현하기에는 모두 부족한 결과를 내놓았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는 알렉스 퍼거슨의 에버딘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 스코틀랜드 리그는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리그와 똑같이 레인저스와 셀틱의 양강체제였다. 그러나 에버딘 감독을 맡은 알렉스 퍼거슨은 절대로 넘을 수 없었던 셀틱과 레인저스를 넘고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여기서 다가 아니었다. 에버딘은 1982-83년 유럽 위너스컵(지금의 챔피언스리그와 비슷한 수준의 대회이다)을 우승하면서 유럽 전역에 스코틀랜드 리그의 위상을 알렸다. 전체적으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 아래 에버딘은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3회 우승, 스코틀랜드 컵 4회 우승, UEFA 위너스컵 1회 우승을 남기며 전성기를 누렸다.
엄청난 업적을 이룬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자연스럽게 유럽 빅클럽의 주목을 한 번에 받았다. 결국 알렉스 퍼거슨은 1982-83 시즌을 끝으로 수많은 유럽 빅클럽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너진 명성을 되찾기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맷 버스비가 은퇴한 지 약 1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 1986년 맨유는 에버딘이라는 스코틀랜드 클럽으로 유럽 무대를 재패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선임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비상의 날갯짓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