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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아 Jan 19. 2024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5

5. 대학 생활 _ (5-5) 대학 연합 패션 동아리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3/12/29 업로드


5-(5-5-1)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_ 마이너리티 파티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대학교 연합 패션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 동아리는 패션 화보부터 영상 촬영은 물론 정기 패션쇼까지 여는 곳이었다.

(전국 5개 지부가 있음을 소개하는 그림. 서울/경인 지부 강조.)


패션쇼를 연다는 것만으로도 지원동기는 충분했다. 그리고 패션 업계에 종사하는 게 꿈인 사람들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그만한 커뮤니티도 없었다.

(전년도에 진행된 동아리 패션쇼 헬퍼로 참여해 구경하고 있는 빈아.)


나는 그곳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해 보면서 스스로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무언가를 위해 달려 나가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과 회의하고 있는 빈아.)


그 해 여름, 건대 커먼그라운드에서 진행됐던 패션쇼 '마이너리티 파티'.

(쇼 이름이 적힌 가벽을 바라보는 빈아.)


남들과 다름을 두려워하는 우리를 '소수자'로 명명하며 크게 장애, 인종, 성이라는 영역을 다룬 쇼였고, 나는 그중 두 번째 스테이지인 인종을 선택해 의상을 제작했다.

(쇼를 설명하는 그림. 스테이지 2의 컬러 및 디자인 요소가 적혀 있음.)


의상의 가장 큰 포인트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피의 색 RED를 사용해 stop racism의 뜻을 강조한 레터링이었다.

(빈아의 의상. 레터링 강조.)


쇼 당일, 나는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뻐하고 있었는데, 리허설을 진행하면서 내 옷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다.

(빈아의 옷을 입은 모델이 무대에 섰다. 빈아가 바라본다.)


같은 무대에 올라가는 의상들을 보며 생긴 욕심에서 비롯된 아쉬움이었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아닌 진짜 내 디자인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 주제를 표현하며 나의 색깔도 녹여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피날레 의상들을 바라보는 빈아.)


쇼가 끝나고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무대에 가득 모였던 사람들, 그 시선 끝에 보였던 카메라, 거기서 터졌던 빛나는 플래시. 그때가 나의 21살 생의 멋진 하이라이트로 남아 있다.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인 사람들. 맨 위로 카메라를 든 촬영자가 있고, 플래시가 터진다.)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4/01/04 업로드


5-(5-5-2)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_ 끝을 : 바다


그해 겨울, 나는 부산 지부에서 열리는 쇼에 참여장을 내밀었다. 여름 쇼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풀 수 있는 기회였다.

(부산행 기차 안. 빈아가 의상을 옷걸이에 걸고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의 전당 BIFF HILL 홀에서 진행되었던 쇼는 '끝을 : 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바다'라는 대자연이 주제인 쇼였다.

(쇼 주제와 스테이지를 설명하는 그림.)


나는 내가 좋아하는 한복을 변형해 의상 제작에 들어갔다.

(의상 스케치를 하는 빈아.)


내가 선택한 스테이지의 주제가 '수평선_이상의 끝'이었고 노을을 표현하는 게 키 포인트였기 때문에 주황색 한복 천을 활용했다.

(주황색 천을 넓게 펼치는 빈아.)


그리고 원형 조각보를 통해 태양을 표현했다.

(완성된 옷의 조각보 패치 부분 클로즈업.)


스모킹 기법으로 파도의 물결을 표현해 상의에 포인트도 주었다.

(파도를 표현한 부분 클로즈업.)


그렇게 만든 옷은 그 스테이지의 오프닝 무대에 올랐고, 나는 멋진 추억 하나를 남겼다.

(빈아의 옷이 무대에 오른다.)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빈아_마음에 들어.

(옷걸이에 걸린 옷을 바라보는 빈아.)


그리고 계속 경험하는 것. 경험을 통해 변화에 욕심을 갖는 것이었다.

(여름 쇼 의상이 옆에 걸려있고, 빈아가 그 옷을 바라본다.)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4/01/05 업로드


5-(5-5-3)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_ 총무가 되다


부산쇼를 진행했던 시기, 나는 그때부터 1년간 동아리 집부 활동을 했다.

(연간 계획을 세우고 있는 집부들.)


그해 서울/경인 지부의 집부는 8명으로 구성되었고, 나는 그중 총무를 맡았다. 총무는 명단과 출석을 관리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예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8명을 소개하는 그림.)


우리 동아리는 주 1회 스터디를 가졌는데, 집부는 그 전후로 온/오프라인 회의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회의 중. 빈아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아무래도 가장 큰 행사인 여름 쇼를 위해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가 회원들이 주도하는 팀프로젝트를 각자 몇 팀 씩 맡아서 관리했기 때문에 그 팀의 일원으로서도 바빴다.

집부들_산 너머 산이구만.

(무거운 배낭을 멘 집부들이 높은 산을 바라본다.)


나는 회원일 때 해보지 못한 화보와 메거진 팀을 담당하며 그들이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게 집부 회의에서 나온 피드백을 공유하며 개선방안을 함께 논의했다.

빈아_이 부분은 이렇게 바꾸는 게 어떨까요?

(회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 빈아.)


그리고 8월. 대망의 여름쇼는 한강 세빛섬 앞 달빛 광장에서 진행됐다.

(달빛 광장의 모습.)


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용 부담 등의 이유로 회원들이 대거 탈퇴하게 되면서 예산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집부_여기, 괜찮겠지?

빈아_그러게.

(위에서 바라본 달빛 광장의 모습.)


그걸 해결하고자 알아봤던, 대관비가 저렴했던 장소 중 하나가 바로 한강이었다.

(광장을 바라보는 빈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기회였던 것 같다. 멋진 쇼를 펼칠 수 있는 기회.

(위에서 바라본 광장 모습에 쇼 장면이 오버랩된다.)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4/01/11 업로드


5-(5-5-4)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_ 판옵티콘


우리의 쇼는 8월 24일 토요일 저녁 7시를 목표로 달렸다.

(포스터를 붙이는 빈아.)


주제는 '판옵티콘'.

(포스터 클로즈업.)


판옵티콘은 영국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의 한 형태로, 한 명의 감시자가 여러 명의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판옵티콘 감옥 구조 표현.)


우리는 그 한 명의 권력자가 꿈꾸는 유토피아, 즉 최대 다수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수용자가 개혁의 일부가 되는 모습을 다루기로 했다. 그리고 그걸 현대 사회로 가져와 온갖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모습에 대입했고, 그 시선의 목적이 과연 보호일지 아니면 감시일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로 했다.

(그림자로 감시탑 안 감시자 표현.)


쇼는 3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됐다.

(control system(통제의 공간 판옵티콘), utopia in panopticon(감시는 자신을 빛나게 해주는 관심), questioning(판옵티콘에 의문을 품은 자들의 반란)에 대한 그림.)


나는 기획부팀장 언니와 함께 오프닝 영상을 제작하는 팀을 담당했는데, 문화비축기지라는 원형 공간을 활용해 카메라 뒤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시선을 표현했다. 그 영상은 쇼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문화비축기지 안 cctv를 촬영하고 있는 팀원들. cctv에 담긴 우리들.)


그리고 나는 첫 번째 스테이지를 선택해 거기에 올릴 의상을 제작했다. 통제된 사회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갈등들을 소재 믹스매치를 통해 표현했다.

(룩북 촬영장. 빈아가 만든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델.)


이번 의상 역시 한복이 활용됐는데, 옛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는 데 쓰였던 장의에서 영감을 받아 숄을 만들었고, 걸으면서 그걸 걷어 올리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모델이 숄을 걸친 모습.)


본쇼가 진행됐던 시각에 백스테이지에 있던 나는 무대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훌륭한 워킹을 하는 모델이었기에 그를 믿고 있었고, 쇼가 끝난 후 여기저기서 보내준 사진과 영상을 봤을 때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모델.)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4/01/12 업로드


5-(5-5-5)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_ 전화위복


쇼 전날, 그 땡볕에 지붕도 없는 야외 장소에서 무대 설치를 지켜봐야 했던 우리.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집부들.)


저녁엔 거기 설치된 값비싼 기기들을 지킨다고 교대로 돌아가며 밤을 지새웠다.

집부_이제 우리랑 교대해!

(밤을 지새우는 집부들. 깜깜한 한강. 저 멀리 교대해 줄 다른 집부들이 온다.)


그 여파로 팔다리가 빨갛게 탔던 나는 이래저래 컨디션이 정말 안 좋았다.

(방에 누워 팔다리에 오이를 올리고 있는 빈아.)


그러나, 그렇게 힘들었음에도 나는 그날부터 쇼가 끝날 때까지 너무 행복했다.

(무대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무대를 바라보는 빈아. 기대에 찬 눈빛.)


부족한 예산에 선택했던 한강의 달빛광장은 주제를 표현하기에 딱 알맞은 원형 무대였고,

집부_이렇게 돌아서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델이 둥근 무대에 맞게 워킹하고 있다.)


쇼가 시작되기 직전 마른하늘에 쏟아졌던 소나기는 맑고 예쁜 노을을 선물해 줬고,

빈아_아까는 그렇게 비가 쏟아지더니.

(무대 뒤로 펼쳐진 노을.)


쇼를 보지 못해 아쉬워했던 백스테이지 스태프들끼리 끈끈한 우정을 다질 수 있었다.

(백스테이지에서 서로 파이팅 하는 사람들.)


모든 쇼가 끝나고 피날레가 이어지는 순간, 인사를 하러 올라간 무대에서 보였던 관객석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대에 올라간 8명의 집부들. 놀란 표정.)


보이지 않는 저 끝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시선에서 보이는 사람들. 관람객으로 가득 찬 광장.)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4/01/18 업로드


5-(5-5-6)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_ 인연 속 행복


그 꿈같았던 날이 어느 순간 과거로 남았을 때, 나는 휴식을 기록하는 개인 SNS에 이런 글을 남겼었다.

(SNS 게시물 화면.)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휴식이라는 단어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데,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 집부가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기 때문이고,

(회의하다 지쳐 쓰러져 있는 집부들.)


그들이 주인공인 글을 한번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텍스트만.)


서로 다른 8명이 만나 1월부터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는데, 각자 자기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했고, 수행하고 있다. 매주 회의했고, 그걸로도 부족해 카톡방이 멈춘 적이 없다....

(사람들에게 정기쇼 단체 티셔츠를 나눠주는 집부들.)


회의만 하다가 쇼가 나흘 남은 날 겨우 회식 한 번 해봤다. 이렇게 지냈는데 어떻게 애틋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부딪히는 8개의 술잔.)


우리 8명,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박수받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쇼 당일 찍은 단체사진.)


나는 쇼가 성공적이었던 결정적인 이유로 우리 집부의 팀워크를 뽑는다. 나는 그들을 보며 한 단체의 회장, 부회장, 각 팀장과 부팀장, 총무가 어때야 하는지를 배웠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집부들. 뒤에서 바라보는 빈아.)


소중한 인연을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은데 무려 7명을 한꺼번에 만났으니, 그 바빴던 3학년 때가 아직도 그리운 건 당연하다.

집부_빈아야!

(뒤를 돌아 빈아를 부르는 집부.)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때처럼 소중한 인연들을 또다시 만나길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 행복했던 나를 재현해내고 싶다.

(행복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달려가는 빈아.)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4/01/19 업로드


5-(5-5-7)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_ 피날레


12월, 어김없이 돌아온 연말 파티를 끝으로 우리 집부의 임기는 끝이 났고, 그날 역시 기록으로 남겼는데,

(연말 파티. 다 같이 모여있는 집부들.)


'... 이들과 함께한 날들이 나에겐 모두 휴식이었고, 올해의 운을 인연에 다 쓴 느낌이 들 정도로 행복하고 좋았다.... 언제 또 이런 사람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일할 수 있을까. 덕분에 가슴 뛰는 22살이었다.

빈아_다시 못할 경험이었어.

(빈아 클로즈업.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다. 모은 손을 바라보는 빈아.)


연말 파티를 끝으로 공식 임기가 종료되었고 우리 8명은 이만 물러가지만, 이 사실이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다. 너무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걸 얻어서 반대로 내가 이 동아리에 준 건 뭘까 하는 생각도 들고,...

빈아_안 울려고 했는데...

(울고 있는 빈아와 집부.)


어느 순간 삶에 깊숙이 들어와 버린 8명의 온기를 이젠 스스로 채워야 할 텐데, 한참 걸릴 것 같다. 아니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제2의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최고의 파트너였기에 우리라는 공간은 두 팔 벌려 힘껏 원을 그려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크기다.'

(다 같이 껴앉는 집부들.)


나는 그 동아리를 통해 그 나이 때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했다.

(백야가 하늘로 올라가고, 빈아가 하늘을 쳐다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위에서 바라본 모습.)


너무 좋은 사람들과 멋진 쇼를 열었고, 서울패션위크 프레스 활동도 했고(거기서 내 취향인 브랜드를 만났다), 내 옷을 여러 무대에 세워봤고, 유명 쇼핑몰에 입점해 운영도 했다.

(동아리 때 만든 옷들(마이너리티 파티, 끝을 : 바다, 판옵티콘).)


그리고 패션 디자인 대회에서 우승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중국 상해로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비행기. 창문으로 빈이가 보인다.)


돌이켜보면 동아리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 내겐 곧 기회였고, 시작하기 위한 짧은 망설임은 나의 도전이자 대견함이었다.

(팻말 하나를 들고 숲을 들어가는 빈아.)


정말이지 찬란하게 빛나고 열정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이었다. 나는 그때를, 그리고 그때의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무 앞에 '패션 동아리' 팻말이 꼽혀 있다.)


 앞서 언급되었던 외부 패션 동아리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대학교 연합 패션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 동아리는 전국적으로 지부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꽤 컸고, 서울/경인 지부만 해도 100명이 넘는 회원이 모여 있었다. 매년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들로 각자의 역량을 뽐낼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는데, 패션 화보부터 영상, 메거진은 물론이고 규모 있는 패션쇼까지 정기적으로 연다. 내가 24기로 들어갔으니, 지금까지 연차도 꽤 쌓였다.


 그 동아리에 지원했던 이유는 오직 '패션쇼'였다. 외부 사람들과의 교류도 물론 중요했지만, 오랫동안 패션 디자이너를 꿈꿨기에 직접 만든 옷을 무대 위에 선보일 수 있다는 게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전년도 쇼의 헬퍼(쇼 스태프)로 지원해 참여했을 만큼 거기에 소속되고 싶었다. 그런 규모를 가진, 쇼를 하는 대학 연합 패션 동아리가 없어서 그런지 매번 지원자가 정말 많기로 유명했다. 내가 면접을 봤을 때도 다대다로 진행됐다. 면접관이었던 해당 연도 집부 8명이 각자 노트북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지원자들을 살피며 답변들을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1년이 지난 후 내가 그 자리에 앉아 면접자들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감회가 남달랐던 경험이었다.


 그렇게 떨리는 면접을 보고 합격 연락을 받았을 때 정말 기뻤다. 1년을 주기로 활동하는 이 동아리는 여름에 무조건 쇼에 한번 서게 되어 있었고, 잘하면 타지부에서 하는 겨울 쇼에 한번 더 설 수 있었다. 학기 중엔 그룹별로 프로젝트를 진행해 기획 발표부터 회의, 촬영이면 촬영, 작품 제작까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힘으로 특별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친목을 다질 수 있는 행사들도 있어서 내 주변인들의 폭이 넓게 확장될 수 있었고, 디자인뿐만 아니라 사진, 영상, 에디터, 디렉터, 스타일리스트, 기타 패션 업계에서 종사하는 게 꿈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보다 멋진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합격 후 처음 기획한 프로젝트가 경쟁 PT에서 떨어지게 됐는데, 그들끼리 모여 월드디제잉페스티벌에 동아리부스를 운영하는, 홍보팀이 구성되었다. 기대했던 활동은 못하게 되었지만 다른 학기에 또 기회가 있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특별한 경험을 해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그전까진 스스로가 롹 페스티벌을 즐길 성격이 못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당일날 사람들과 함께 엄청 즐겁게 뛰어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 현장이 아직도 생생할 정도. 그때 처음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고 그들과 함께 무언가를 위해 달려가는 것이 내게 큰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고, 대망의 패션쇼가 기다리고 있는 여름 방학이 왔다. 패션쇼의 주제는 '마이너리티 파티'. 남들과 다름을 두려워하는 우리를 '소수자'로 명명하며, 크게 장애, 인종, 성이라는 영역을 다룬 쇼였다. 나는 그중 2번째 스테이지인 인종을 선택했고, 붉은 레터링이 포인트인 의상을 제작했다. 바지엔 위아래가 줄로 연결된 부분이 포인트였는데, 그 줄을 만들 때 다양한 스킨 컬러의 원단을 사용했고, 그것들이 합쳐져 블랙(아랫부분), 즉 모든 색의 합이 된다는 뜻을 담았다. 그 '합'은 인종 간의 '화합'을 의미했다. 레터링은 상의와 망토 부분에 직접 물감으로 새겼는데, 상의엔 하나의 심장에서 뻗어 나가는 white~black의 스킨 컬러 스팩트럼과 피의 색 red를 표현했다. 그리고 망토엔 STOP RACISM의 각 철자가 포함된 10개의 문장을 적었다.


 사실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내가 배운 것들을 최대한 활용한 의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더 써서 더 과감한 도전을 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같은 무대에 올라가는 수십 벌의 의상들을 지켜보면서 동일한 시간에 저렇게 멋진 의상을 만들었구나 하는 무력감에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좌절이 아닌 욕심이 생겼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아닌 진짜 내 디자인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 할수록 늘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래서 그날은 방학 동안 그 쇼 하나를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군분투했고, 그 안에 소속되어 그 진한 감동을 함께 느꼈다는 것에 만족했다. 쇼가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무대에 가득 모였던 사람들, 그 시선 끝에 보였던 카메라, 거기서 터졌던 빛나는 플래시. 그때가 나의 21살 생의 멋진 하이라이트로 남아 있다.


 사실 나는 그때 부천국제만화축제(동아리 패션쇼 2주 전)에도 설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했던 탓에 두 착장의 옷을 제작해야 했다. 그 쇼는 '패션왕들의 대학 축제'가 주제였는데, 나는 만화 축제라는 행사에 맞게 '만화'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생각들을 의상에 녹였다. 만화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 백지라고 생각해서 원피스 겉감을 백색으로 덮었고, 다른 색을 돋보이게 해주는, 그 백색만이 가진 특징을 살리기 위해 색의 3 원색을 조각보로 제작해 원피스 밑단 트임 안쪽에 장식했다. 걸으면서 펼쳐지는 색감들이 그 의상의 포인트였고, 그래서 그때 내가 정한 내 옷의 이름은 '백지, 축제에 물들다'였다.


 리허설 때 의상 지퍼에 문제가 생겨 급하게 옷핀과 바느질로 수선을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8월 땡볕의 더위에 동아리 쇼를 앞둔 상황에서 모든 것들이 정신없었을 때, 이런저런 문제들도 생겨 속상했었다. 그래도 함께한 사람들이 곧 동지였고, 그래서 쇼가 끝난 뒤 비로소 밀려왔던 해방감에 눈물이 핑 돎과 동시에 안심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 역시 만만치 않은 큰 무대였고, 관객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에 많이 긴장했더랬다.


 그렇게 치열한 여름방학을 마치고 찾아온 2학기. 내가 속한 팀은 또 한 번 경쟁 PT에서 탈락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로 투입된 팀은 콘텐츠 제작 팀. 우리 팀은 동묘 구제 옷 시장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제작해 동아리 SNS에 업로드하기로 했다. 그 첫 게시물의 제목은 '동묘에서 4만 원으로 쇼핑하기'. 페미닌팀과 매니쉬팀으로 나눠 직접 코디하고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로 기획한 건 '동묘 놀거리 소개'. 동묘는 사실 맛집과 골동품숍, 헌책방까지 다양한 놀거리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을 직접 체험하며 거기서 산 옷을 입고 소개하는 것도 우리 동아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또 한 학기를 알차게 보냈다.


 그리고 동아리 행사의 피날레, 연말 파티를 시작으로 다음 해 집부에 뽑혀 그 1년을 또 바쁘게 보내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내가 3학년이었던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학기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 나는 겨울 방학 때 부산/경남 지부에서 하는 패션쇼에 참여했다. 그 쇼는 '끝을 : 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바다'라는 대자연이 주제인 쇼였다. 여름 쇼에서 느꼈던,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의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욕구를 풀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한복을 변형해 제작에 들어갔다. 노을의 색감이 포인트였던 만큼 주황색 계열의 한복 천을 활용했고, 원형 조각보를 통해 태양을 표현했다. 또한 스모킹 기법으로 파도의 물결을 표현해 상의에 포인트를 주었다. 그렇게 만든 내 옷은 그 쇼에서 마지막 스테이지인 '수평선_이상의 끝'의 오프닝 무대에 올랐다. 의상 피팅부터 룩북 촬영, 패션쇼까지 총 3번이나 부산을 오가야 했지만 그 여정들이 다 미화될 만큼 쇼는 만족스러웠다. 그걸 보러 와준 친구들이 있었기에 쇼는 더욱 빛났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집행부 총무로써의 역할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쇼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빠듯했기에 연말파티 이후부터 우리 집부들은 매주 회의를 진행했다. 서울/경인 지부의 집부는 8명으로, 회장, 부회장, 기획팀장, 기획부팀장, 디자인팀장, 디자인부팀장, 홍보팀장, 총무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 맡은 역할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늘 함께 회의하며, 학기 중에 하는 프로젝트를 디렉팅 하고, 패션쇼 등 큰 행사에 대비한 준비를 이어간다. 나는 그중 총무를 맡았는데, 총무는 명단과 출석을 관리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예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돈을 관리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가장 신경 써야 할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동아리는 주 1회 스터디를 가졌는데, 집부는 그 전후로 온/오프라인 회의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아무래도 가장 큰 행사인 여름 쇼를 위해 장소 대관부터 감독 섭외, 예산 설정 등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가 회원들이 주도하는 팀프로젝트를 각자 몇 팀 씩 맡아서 관리했기 때문에 그 팀의 일원으로서도 바빴다. 그 내용들을 만나는 날 모두 공유하며 피드백을 주고받았고, 수용과 개선을 거쳐 최종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노력했다. 엎어진 것들도 다시 살피며 1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1학기, 2학기에 각각 화보와 매거진 팀을 관리하게 되었고, 전반적인 촬영 콘셉트 선정이나 진행은 회원들이 주도하되 집부 회의를 통해 결정된 피드백 내용들을 토대로 개선 방안을 함께 논의하며 방향성을 잘 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두 작품 모두 너무 만족스럽게 나와서 그걸로도 충분히 뿌듯했지만, 무엇보다 회원일 때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리고 8월. 대망의 여름 쇼는 한강 세빛섬 앞 달빛 광장에서 진행됐다. 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회원들이 대거 탈퇴하게 되면서 예산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걸 해결하고자 최대한 적은 비용이 드는 장소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당시 그 장소가 시간당 청소 비용만 받고 장소 대관비를 따로 받지 않아 낙찰되었다. 3만 원. 무려 한강을 배경으로 쇼를 하는데, 장소에 들어간 비용은 3만 원이었다. 무대에 들어가는 예산은 조명, 무대, 음향 감독님들의 배려로 정말 저렴하게 진행되었고,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았던 예산은 집부의 사비로 채워졌다. 이 점이 총무로써 아직까지도 아쉽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에, 그만큼 우리가 쇼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우리의 쇼는 8월 24일 토요일 저녁 7시를 목표로 달렸다. 주제는 '판옵티콘(Pan-Opticon)'. 판옵티콘은 영국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의 한 형태로, 원의 중심에 위치한 감시탑에서 원형으로 둘러싸인 죄수들을 감시하는 형태의 건물이다. 한 명의 감시자가 여러 명의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고안된 형태인데, 그 한 명의 권력자가 꿈꾸는 유토피아, 즉 최대 다수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수용자가 개혁의 일부가 되는 모습을 다뤘다. 그걸 현대 사회로 가져와 온갖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모습에 대입했고, 그 시선의 목적이 과연 보호일지 아니면 감시일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주제였다.


 이번 쇼 역시 세 개의 스테이지로 나눠 진행되었고, 각각 control system(통제의 공간 판옵티콘), utopia in panopticon(감시는 자신을 빛나게 해주는 관심), questioning(판옵티콘에 의문을 품은 자들의 반란)으로 구성했다. 나는 총무로서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패션쇼를 위해 나눠진 팀들 중 오프닝 영상 팀을 담당했고, 디자이너로써도 의상을 제작했다. 그 여름은 정말 집에 있던 날보다 밖에 있던 날이 많았고, 가족과 친구들보다 집부들, 회원들과 더 자주 만났다.


 오프닝 필름은 기획부팀장 언니와 함께 담당했는데, 판옵티콘이라는 대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원형 건물을 물색하며 촬영 콘티 회의에 들어갔다. 감옥의 공간, 그 공간에 있는 cctv, 그 cctv 뒤에 있는 감시자의 시선 속 화면들이 현대 사회의 스마트폰, 노트북 등으로 연결되면서, 그 카메라 뒤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시선을 표현하기로 했다. 장소는 문화비축기지. 광활한 원형 공간이 우리의 주제를 표현하기에 딱이었다. 그때 제작된 영상은 두고두고 마음에 든다. 물론 쇼에 들어간 각 스테이지별 화보와 필름들도 다 마음에 들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기여한 부분이 있는 것에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첫 번째 스테이지에 올릴 의상을 제작했는데, 통제된 사회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갈등들을 콜라주와 소재 믹스매치를 통해 표현했다. 의상의 결정적인 포인트는 옛 여인들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데 사용했던 장의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한복 천이었다. 그 천으로 얼굴을 가리며 등장했다가 걸으면서 그 천을 벗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본 쇼에서 백스테이지에 있었기 때문에 무대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내 옷을 입어준 모델분이 너무 훌륭한 워킹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고 맡겼던 기억이 난다. 쇼 이후 여기저기서 보내준 사진과 영상을 봤을 때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쇼 전날로 돌아가면, 그 땡볕에 지붕도 없는 야외 장소에서 무대 설치를 지켜봐야 했던 우리였다. 그리고 거기 설치된 값비싼 기기들이 다음날 쇼에 무사히 있어야 했기 때문에 교대로 돌아가며 밤을 지새웠다. 나는 그때 팔다리가 빨갛게 탄 상태였고, 그 와중에 월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그날이 겹쳐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근데, 아직까지도 정말 신기한 부분인데, 그렇게 힘들었음에도 나는 그날부터 쇼가 끝날 때까지 너무 행복했다. 마치 엄청난 황홀로 가득 찬 꿈을 꾸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이래서 디자이너들이 그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쇼를 계속하려고 하는구나, 싶었다. 살면서 다시 느껴보기 힘든 벅참이었다.


 쇼가 시작되기 직전, 마른하늘에 내리던 소나기에 엄청 당황했지만, 그 덕분에 쇼가 시작된 시간의 하늘이 정말 맑고 예뻤고, 백스테이지에 있어 쇼를 보진 못했지만 그 뒤에서 함께 했던 모델, 헬퍼, 회원들과 정말 끈끈한 우정을 다질 수 있었다. 부족한 예산에 선택한 원형 무대는 주제에 걸맞으면서도 한강의 유동 인구를 끌어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모든 쇼가 끝나고 피날레가 이어지는 순간, 참여한 회원들이 일렬로 서서 무대를 쭉 걷는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그 마지막에 집부 8명이 관객들에게 인사하며 쇼를 준비한 사람이 우리였음을 알리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도 역시 잊지 못한다. 무대로 올라서자마자 보였던, 원형 무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둘러싸여 있던 모습. 그렇게 우린 토요일 저녁, 옆에 야시장이 열리고 있었던 한강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여줬고, 그래서 그 누구보다 멋진 사람들이었다. 우리 무대를 보러 와준 가족들과 고등학교 친구들, 전집부 분들도 기억에 남는다. 먼 곳까지 나를 위해 달려와준 그들의 마음이 참 감사했다.


 그 꿈같았던 날이 어느 순간 과거로 남았을 때, 나는 개인 SNS에 글을 하나 남겼었다. 나는 지금도 그 공간에 나의 '휴식'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날 올린 글은 그저 그 8명이 주인공인 글이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휴식이라는 단어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데,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 집부가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기 때문이고, 그들이 주인공인 글을 한번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8명이 만나 1월부터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는데, 각자 자기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했고, 수행하고 있다. 매주 회의했고, 그걸로도 부족해 카톡방이 멈춘 적이 없다.... 회의만 하다가 쇼가 나흘 남은 날 겨우 회식 한 번 해봤다. 이렇게 지냈는데 어떻게 애틋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지금은 힘든 게 다 지나가서 미화됐지만 솔직히 상상 이상이었다.... 우리 8명,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박수받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쇼가 성공적이었던 결정적인 이유로 우리 집부의 팀워크를 뽑는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한 단체의 회장, 부회장, 각 팀장과 부팀장, 총무가 어때야 하는지를 배웠다. 너무 잘 맞아서 지금까지도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만날 때마다 재밌고 즐겁다. 소중한 인연을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은데 무려 7명을 한꺼번에 만났으니, 그 바쁜 3학년 시기가 아직도 좋았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12월, 어김없이 돌아온 연말 파티를 끝으로 우리 집부의 임기는 끝이 났다. 그날 회장 오빠가 갑자기 우는 바람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지만(사실 쇼가 끝났을 때도 전집부님들의 위로에 펑펑 울었었다) 끝까지 아름다운 우리였다. 그날도 역시 기록으로 남겼었는데,


 '... 이들과 함께한 날들이 나에겐 모두 휴식이었고, 올해의 운을 인연에 다 쓴 느낌이 들 정도로 행복하고 좋았다.... 언제 또 이런 사람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일할 수 있을까. 덕분에 가슴 뛰는 22살이었다. 연말 파티를 끝으로 공식 임기가 종료되었고 우리 8명은 이만 물러가지만, 이 사실이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다. 다음 주에 또 회의하러 만날 것 같고 카페 한 공간을 우리들 목소리로 가득 채우고 있을 것 같다. 이런 이별은 처음이라 그저 아쉽고 슬픈 걸 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너무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걸 얻어서 반대로 내가 이 동아리에 준 건 뭘까 하는 생각도 들고,... 어느 순간 삶에 깊숙이 들어와 버린 8명의 온기를 이젠 스스로 채워야 할 텐데, 한참 걸릴 것 같다. 아니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 늘 우리 집부들은 내 뒤를 받쳐주고 옆에서 잡아주고 앞에서 끌어줬는데, 이제는 홀로 서기를 해야 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하다.... 우리는 제2의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최고의 파트너였기에 우리라는 공간은 두 팔 벌려 힘껏 원을 그려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크기다.'


 나는 그 동아리를 통해 그 나이 때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했다. 너무 좋은 사람들과 멋진 쇼를 열었고, 서울패션위크 프레스 활동도 했고(거기서 내 취향인 브랜드를 만났다), 내 옷을 여러 무대에 세워봤으며, 유명 쇼핑몰에 입점해 운영도 했다. 패션 디자인 대회에서 우승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중국 상해로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동아리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 내겐 기회였고, 시작하기 위한 짧은 망설임은 나의 도전이자 대견함이었다. 나는 학과 행사를 포함해 그 해에만 약 6번의 MT를 기획했다. 정말이지 찬란하게 빛나고 열정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이었다. 나는 그때를, 그리고 그때의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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