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
노랑자와 나, J는 대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는 서로 아주 다르면서도 중요한 부분에서는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어서, 졸업 이후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연을 이어 나가고 있다.
우리가 모여 있으면 친구들은 우리를 노부린이라고 불렸다. 각자의 이름 한 자씩 따서 만든 네이밍이었다. 셋을 부르는 그 하나의 이름이 자연스럽고 편안해 셋이 뭔가 작당하게 된다면 꼭 ‘노부린의 OOO’내지 ‘NBR OOO’이라고 불러야지 생각한다.
노부린은 일 년에 두어 번 여행을 간다. 담양, 경주에 이은 이번 여행지는 남해. 요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던 탓에 서울에서 가능하면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해 꼬박 다섯 시간을 달리면 산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섬. 지금껏 보아 왔던 섬들은 보통 물에 동동 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은데, 육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여러 개의 섬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실제로 그렇긴 하지만) 떠 있다기보다 물아래에서부터 솟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해에 도착한 날에는 아름다운 노을을 따라 자전거를 달렸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차를 얻어 타고 느지막이 금산으로 출발했다. 복곡 1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가니 복곡2주차장과 보리암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산의 입구가 나왔다. 굳이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올 필요가 없어서 우리는 사장님 추천 코스를 따라 산을 넘어 상주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시월이 다 지나갔지만 산은 아직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단풍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산을 올랐다.
슬슬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언덕을 따라 걷다 훅, 바람이 불어 잠시 멈추었다. 금산의 중턱에서는 어쩐지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왼편을 바라보니 해가 뜬 방향으로 시야가 트여 있었다. 홀린 듯이 다가가 멀리 풍경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이런 산은 없었다. 이것은 산인가 바다인가. 어떤 산을 올랐어도 그렇게 바다를 볼 수는 없었다. 아니 글쎄, 바다를 보러 산을 올라가다니?
가까이에는 완만하게 흐르는 붉은 나무들 사이로 푸른 침엽수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푸른 잎이 단풍에 돋보이는 것인지, 푸른 잎에 단풍이 돋보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뿌옇게 내리는 아침 빛 아래로 부드럽게 뒤섞여 아름다운 무늬를 냈다. 고개를 조금 들고 시선을 멀리 던지면 하늘과 바다 사이의 경계가 흐려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하늘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바다와 산의 경계 또한 모호했는데, 산 끄트머리 사이로 바다의 끝이 파고들어 깍지를 끼고 있었다. 어느 한 군데도 어색하거나 모나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 옹긋 봉긋 솟아 있는 작은 섬들 사이로 작은 바다의 표면이 단단하게 출렁거리고 그 위로 햇빛이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사진만 찍기에는 마음이 급해지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간간히 멈추어 가며 이십여 분을 올라가자 여러 목적지로 이어지는 갈래길이 나왔다. 배가 고프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우리는 진시황 아들이 귀양살이를 했다는 전설이 있는 화엄봉까지 내려갔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내려가는 길에 있던 데다 급한 경사에 뻘뻘 대며 돌아오긴 했지만 화엄봉으로 가는 길, 아찔한 골짜기 위에서 바라본 남쪽의 가을은 커다랗고 포근했다. 같은 분위기 안에 싸여 있던 산과 바다의 모습이 마냥 조화로워 보였다. 우리는 적당한 바위 비탈에 앉아 오이와 방울토마토를 아삭거리며 진시황 아들이 어쩌고 저쩌고, 불로초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나누다 점심을 먹으러 금산산장으로 향했다.
금산산장은 이미 SNS에서 아주 유명한 곳으로 컵라면과 전, 식혜 같은 것들을 꽤나 비싼 가격에 파는 산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바다 풍경을 바라볼 수 있기에, 약간의 등산을 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적절한 요깃거리와 사진 촬영의 장소를 제공할 수 있기에 크게 사랑받는다. 바깥에 앉기에는 해가 조금 뜨거운가 싶었지만 이 풍경을 놓고 산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 우리도 얼른 자리를 잡고 라면을 사러 갔다. 작은 방 안에는 할머니 두 분이 열심히 젓가락 뭉치를 뜯으며 앉아 있었다. 카드 결제는 당연히 안 되고, 노랑자가 남은 현금을 탈탈 털어 라면을 사서 나란히 뜨거운 물을 받았다. 진라면, 신라면, 새우탕면. 나는 라면 종류가 서너가지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자 다른 라면을 고른 게 조금 웃기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와 앉아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끓는 물 부은 라면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했던 나는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향한 보리암은 생각했던 것보다 큰 절이었다. 쉽게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절 안은 생각보다 붐볐다. 형형색색의 등이 절과 절 사이에 걸려 있었고, 절 뒤편의 작은 굴에는 금빛 부처의 상이 서서 사람들의 인사와 기도를 들어주고 있었다. 여러 금액대별로 시주를 한 누군가의 소원을 열심히 빌어 주는 스님의 목소리가 사이의 공간들을 메웠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적힌 소원 쪽지를 훔쳐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원과 소원을 듣고 상상하는 건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어려운 시기의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도 작은 소원을 하나 빌었다.
내려오는 길의 쌍홍문 근처에는 작은 굴이 여러 개 있었는데, 모두 입구가 막힌 채 <무속 행위를 금지>라는 팻말을 내걸고 있었다. 뭔가 많은 일이 비밀스럽게 일어났을 것 같은 곳이었다. 보름달이 뜨는 날 자정에 올라와 소원을 빌면 여우나 도깨비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결혼을 요구하거나, 간이나 눈 같은 걸 달라고 했을 거다.
산은 늘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어려웠지만 금산은 바닥에 쌓인 단풍잎에 자꾸 발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발걸음이 더 더뎠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한 시간여를 내려와 도로를 따라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걷는 내내 뒤를 많이 돌아보았다. 바다가 저 위에 있었다.
금산에서 만난 바다처럼, 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고,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경우들이 있다. 어쩌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도 그런 것이 아닐까, 사실은 너무나 가까운 관계이지만 그렇다는 걸 모르는 수많은 관계들. 노부린은 정말 다르지만 어쩌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일지도, 어쩌면 같은 곳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관계들을 하나씩 깨달아 소중히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