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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닿는 곳

<끝>

by 빈부분

1.

끝이라는 단어에는 어딘가 따뜻한 느낌이 있다. 그 단어를 작게 뱉으면 편안하고 긴, 보장된 안식, 잠, 나를 괴롭히는 것들에서 마침내 해방되는 시간과 공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발돋움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손끝과 발끝, 말끝, 털의 끝부분이나 코끝처럼 우리가 종종 끝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살살 쓰다듬을 때 느껴지는 부드러운 모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끝이라는 발음에서 오는 구수한 기분 탓일 수도 있겠다.

보통 나의 끝이 닿는 곳에는 또 다른 이의 끝이자 그의 시작이 있다. 나와 남이 이어질 수 있는 장소들은 시선이나 말의 끝과 같은 곳들이었다. 온전히 나의 끝을 기다려 이해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그걸 깨달은 후로부터는 말을 함부로 자르거나 눈을 피하는 나의 나쁜 버릇을 조금씩 고쳐 나가고 있다.

일 년 365일 중 하루 정도는 모두가 주목하는 끝이 있다. 매년 1월 1일 열두 시가 되면 종이 울리고 수천수만 개의 고리들이 얽히고설켜 다른 이에게 보내는 문자나 카톡 메시지가 더디게 간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아쉽고도 간지럽게, 잔을 부딪히며 서로의 끝을 맞대고 새로운 시작들을 단단히 묶는다. 이번 한 해는 특히나 시간이 툭툭 끊어지고 엉키어 지나갔을 것임에도 부디, 모두가 나름의 매듭들을 묶고 잠들 수 있기를 바라 본다.


2.

누군가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해 줬다. 사실 사는 건 죽는 것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언제 들었던 이야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나는 끝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마다 종종 그 말을 되짚어 보곤 했다. 나는 무엇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발치 바로 아래의 땅바닥은 보이지만 저 멀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는 순간에는 끝이 곧 시작인 걸 알기에 막연하게나마 또 시작이 있겠거니-하겠지만, 결국에는 시작 없는 끝을 향해 가는 순간이 다가올 거고 나는 그 순간 내가 걸을 걸음의 속도를 상상한다. 그게 조금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몇몇 사람들의 생이 끝난 후부터 빛나기 시작하는 걸 보면 꼭 그럴 것만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올해의 끝을 앞두고 돌아보면 어려웠던 시간 안에서도 나는 꽤 여러 번의 끝을 경험했고, 그 안에는 웅장하게 시작했다 졸렬하게 끝난 일도, 절대 끝내지-끝나지/못할-않을 것만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자 끝이 나버린 일도, 금방이고 끝이 날 것 같다가도 끝나지 않는 것에 매여 있던 적도 있었다. 물론 끝 자체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시작이나 중간 즈음에서 날린 일들도 몇몇 있었다. 아무튼, 각각의 끝에 도착했을 때 쥐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후회까지도 잘 모아 놓아야 나중에 뒤적이다 어설프게 웃을 수라도 있을 것 같아 올해의 끝난 것들을 열심히 뭉쳐 놓았다. 발로 슥 밀어놓고 내년의 새로운 끝들을 기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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