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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Feb 07. 2021

둘째 날의 등산

서울 청계산

 새해의 첫날은 최대한 밍기적거리며 보냈다. 한 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다짐이나 목표를 정하지도, 와장창 쌓여 있는 지난해의 흔적들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12월 31일까지 출근을 해 일을 한 탓이거나, 퇴근하면서 장을 잔뜩 보고 새해를 맞아 만두를 빚겠다며 새벽 세 시까지 쭈그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날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늦게 일어났고, 전날 빚은 만두로 떡국을 끓여 먹은 다음 집 구석구석을 기웃거리다 침대로 돌아가 낮잠을 잤다. 알차게 게으른 날이었다. 


 바지런히 산을 오른 건 새해의 두 번째 날이었다.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전날의 게으름이 묻어버렸는지 이불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채비를 했다. 치에게 빌린 작은 가방에 찐만두와 물병 두 개, 귤 몇 개를 챙기고, 옆구리의 끈을 당겨 가방을 몸에 꼭 맞추어 멘 다음 오래된 등산용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J와 나란히 인도 공항에 등산화를 두고 비행기를 탄 이후로, 가지고 있는 신발 중 유일하게 발목까지 꽉 고정할 수 있는 갈색 워커를 신고 산을 오른다. 엄밀히 말해서 등산화는 아니지만 자기 역할을 훌륭히 하는 중)


 아파트 단지에서 열리는 토요 장을 지나쳐 지하철로 걸어가는 길에서 새해가 시작되는 기분을 느꼈다. 늘어선 파란 천막 아래는 부산스러웠고 활기찼으며 어딘가 기대되는 따뜻한 냄새가 났다. 맑은 겨울 공기가 반가웠다.


 청계산 입구 역에서 내려 빨간 패딩을 입고 나온 노랑자를 만났다. 청계산의 입구로 걸어가는 오르막에는 각종 밥집과 아웃도어 용품점, 막걸리, 어묵, 김밥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를 산에 대해 검색하는 날에는 꼭 어느 집 김밥이 가장 맛있고 유명한지를 함께 알아보게 되는데, 청계산 근처에는 다시마를 넣은 김밥이 유명한 듯했다. 우리는 김밥을 사고, 만두와 계란으로 든든히 속을 채운 다음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를 사람들은 웬만해선 다 새해 첫날 정상을 보고 내려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둘째 날에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처럼 첫날을 놓친 사람이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마스크 위로 보이는 얼굴들은 조금은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조금 더 끝에 가까워지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를 또 어떻게든 잘 나겠다는 마음들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나처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니까 대개 그런 마음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


 청계산은 관악산에 비하면 아주 완만하고 오르기 쉬운 산이었지만 꽤 오래 운동을 쉬었던 터라 숨이 금세 가빠 왔다. 얼마간 걸어올라 가자 작고 편평한 터가 나왔다. 지나가던 아저씨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커다란 바위가 비스듬하게 기대 만든 구멍을 세 바퀴 돌면 청계산의 기운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와 노랑자는 성큼 걸어 들어가 빙글, 빙글, 빙글 세 바퀴를 돌았다. 우리가 그랬듯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바위를 돌며 뭔가를 느끼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산의 정기를 받는 건 조금 어지러운 일이었다. 



 탁 트인 정상에서 소원을 빌거나 새해의 다짐을 하고 싶었지만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정상의 모습이 조금 심심했다. 설마 여기가 정상이야? 음.. 일단 사진은 찍고, 일단 조금 내려가서 아까 올라오다 본 바위 위에서 김밥이나 먹자.


 바위 위에서 김밥과 남은 만두를 먹는 동안 불어오는 바람이 꽤나 매서웠고 땀이 식어 꽤 추웠다. 노랑자와 나는 후다닥 배를 채우고 나서는 하고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 사랑, 가족 같은 주제를 번갈아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내려왔다. 여러모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채 비슷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꽤 복 받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계산에서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우리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길이 아닌데, 하면서도 내려가다 보면 집에는 갈 수 있겠지 하며 내리막을 내려오다 작은 절을 만났다.



 불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커다란 불상 앞에 서니 마음이 조금쯤 숙연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산 위에서 빌지 못했던 소원을 마저 빌었다. 새해 첫날보다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커다란 다짐보다는 작은 움직임으로. 이렇게 작은 날들이 모여 또 지나갈 한 해를 만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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