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속의 여유

<산책>

by 빈부분

산책이라는 단어가 주는 산뜻함과 느긋한 기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산책에 대해 생각하다 내가 목적 없이는 잘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 정상까지 오르겠다든지 근육의 단련이라거나 장을 본다든지 하는 명확한 목표가 있으면 모를까, 굳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바깥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이었던 거다.


걷기보다 굴러다니기를 더 좋아하는 탓에,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가장 자주 하는 산책은 출퇴근길이 됐다. 집 앞에서 지하철 역까지 슬슬 걸어가고 저녁에는 반대로 슬슬 걸어오는 십여 분 남짓한 짧은 여정. 그 짧은 순간에 집 앞의 작은 산에 새순이 돋았는지, 벚꽃과 개나리는 얼마나 피고 졌는지, 해는 언제쯤 뜨고 지는지 둘러보는 것으로 내가 지금 어떤 계절 안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발을 내딛으며 걷다 보면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한 출퇴근길이 조금은 편안해지기도 한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는 저렴한 양파나 감자 같은 것들을 사러 집 근처의 채소가게까지 산책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두 손이 무거워 산책이라기보다 노동하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채소가게까지 가는 길의 산자락에는 항상 계절이 묻어 있어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겨우내 숨죽였던 풀과 나무들의 시간이 이제는 제대로 흐르고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이번 봄에는 조금 더 채소가게를 자주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게으름뱅이인 나도 일상을 벗어난 여행에서만큼은 산책을 위한 산책을 즐긴다. 여유 속의 여유, 시간을 호화스럽게 쓰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애인이 아침 일찍 눈을 뜨는 경우가 거의 없는 덕에 나는 보통 혼자 온 여행자처럼 아침 시간을 보낸다. 대충 외투를 걸치고 슬그머니 방은 나선다. 손목에 카메라를 대롱거리면서 조금 걷다 보면 처음 보는 장면들이 눈앞을 스친다. 잘 깔린 포장길을 걷다 길이 아닌 곳으로도 들어가 보고, 햇빛을 쬐며 좀 누워 있기도 하다 운이 좋으면 고양이도 만난다. 배가 고파져서 후다닥 돌아가 애인을 깨워 먹는 아침은 또 그렇게 맛있다.


여행에서의 산책길


어떤 종류의 산책은 혼자 하지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산책도 좋다. 그런 산책이라면 출발 지점에서 한 바퀴 빙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도 괜찮다. 엄마 집에 가도, 할머니 집 근처에도, 서울의 구석구석에도 꼭 산책하기 좋은 그런 길들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의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어려웠던 마음들을 조금씩 흘려 내보낸다. 부지런히 자주 걷고 싶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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