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태생이 집순이라 집 밖에 나가는 걸 즐기지 않는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있다. 바로 한강이다.
3월의 중순, 금요일, 이른 퇴근을 한 후 운동을 마치고 나오니 날이 어둑하다. 그치만 날이 좋았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제법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겨울보다는 봄에 가까운 바람이었다. 어떡하지? 살짝 고민하다가 한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랜만의 산책이었다.
네온사인 가득한 길을 지나고, 경적이 울리는 한강변 차도를 건너 그렇게 10분 정도 걸어가면 한강이 보인다. 밤이 되니 나무는 초록을 잃었다. 햇살을 받아 빛났던 초록은 어둠의 농담으로만 가늠해볼 뿐이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초록빛을 띄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어둑어둑했다. 그런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곳을 지나서 강가 바로 앞까지 갔다. 강은 새카맣다. 어둠으로 가득한 강은 솔직하다. 주황빛을 받으면 주황색으로, 하얀 빛을 받으면 하얀색으로 반짝인다.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직은 3월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다.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운동을 하는 그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로 제법 붐비게 될 테다. 그렇게 또 10분정도 걸으면 내가 늘 가던 장소가 나온다. 노을을 보기 딱 좋은 장소라, 해질녘이 되면 제법 사람이 많지만, 밤이 되어 그런지 아니면 아직 쌀쌀함이 남아 있어 그런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 그 장소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까 제법 큰 소리를 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눈 앞에서 찰랑이는 물을 가만히 바라본다. 일렁 일렁거리는 강물.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파도? 물살? 강물은 쉴새없이 움직인다. 해질녘엔 노을빛을 받아 강렬한 붉은 빛으로 반짝이더니, 지금은 까만 강물 위에 옅은 하얀 빛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아파트가 빽빽했다. 한강뷰 아파트라니. 비싸겠지. 고작 이 강이 뭐라고, 이것이 보이면 그리 비싸질까 싶다가도, 굳이 시간을 내어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그래, 비쌀 수도 있겠구나 싶다. 나는 언제 저런 집에 살아보나, 아니 이번 생에 살아볼 수는 있나. 그 아파트들을 바라보다 괜한 서러움이 샘솟길래, 자리를 떴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강변을 걸으니 아직은 차가운 강바람, 가만히 들려오는 물의 소리, 섞여드는 경적과 차도의 소음, 발 밑에서 올라오는 풀냄새가 느껴진다. 이것들을 느끼고 있으면 어딘가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래, 나도 한강근처에 살고 있잖아. 걸어서 10분이면 오는 걸. 한강 근처에 산다는 건 꽤 축복받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서러움이 쏙 들어간다.
나는 지금도 종종 한강을 찾아가 걷는다. 편의점에 갔다가 밤 공기가 좋아서 비닐봉지를 덜렁이며 한강을 찾고, 나른한 주말 오후, 쏟아드는 햇볕이 예뻐서 슬리퍼 끌고 한강으로 향하고, 해질녘, 저 끝으로 보이는 노을의 빛이 예뻐서 무작정 한강으로 간다. 그리고 이렇게 한강을 찾아가면 기대하지 않았던 반짝이는 일상 - 시원한 밤공기, 반짝이는 강물, 스치는 잎사귀 소리, 짙은 초록, 예쁘게 핀 꽃, 온 색깔이 섞여든 하늘 같은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무슨 약속이, 어떤 이유가 필요하지 않아도 불쑥 찾아갈 수 있는 한강이 근처에 있다는 건 정말로 축복받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