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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여리고 옅은 색과 작고 사소한 말소리들

<산책>

by 선아키

날이 풀렸다. 지난겨울 영하 17도 아래로 내려갔던 날들은 다 없었던 일인 양, 벚꽃은 관측 이래 가장 빠르게 개화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벚꽃뿐 아니라 개나리가, 매화가, 목련이, 산수유가 슬그머니 제 색을 뽐내기 시작한다. 봄이 왔다. 선릉이 보이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이제 두 번째 맞는 봄. 점심을 일찍 먹는 날이면, 슬쩍 창밖을 살피고 누군가 제안한다. 산책 나갈까요?


산책의 목적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지만, 그래도 몇 가지 코스로 나뉜다. 횡단보도는 보통 건너지 않는다. 걸음을 멈춰야 하는 그 몇 분이 심리적 거리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길을 건너지 않는 선에서는 보통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맛있는 커피를 찾아 떠나거나, 선릉으로 들어가거나. 그리고 요즘엔 선릉을 더 자주 들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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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에 3000원인 점심시간 입장권을 사서, 선릉 안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초봄일 때는 들어가자마자 큰 벚꽃 나무가 화려하게 먼저 반긴다. 단언컨대 내가 본 벚나무 중 가장 높고 길쭉하다. 한강변이나 여의도에 심긴 것보다 훨씬 오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벚나무는 몸통과 가지가 다른 나무보다 유독 어두운 색이라, 벚꽃을 더 대비되어 보이게 한다. 바람이 불면, 벌써부터 벚꽃잎이 흩날린다. 언제라도 다 져버릴 것처럼 날리는 벚꽃은 사람을 조금 안달 나게 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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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들을 지나치면 구불구불한 가지들이 패턴처럼 보이는 소나무 군락을 만났다가, 개나리가 줄지어 피어 있는 산책길을 지났다가, 버들나무를 멀리서 바라보았다가, 무슨 나무인지 확실하지 않은 작고 여린 잎사귀들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쓴다. 새싹들은 옅은 연두색 빛을 띠고선 햇빛을 잔뜩 머금고 있다. 딱 봄에만 볼 수 있는 색이다.



산책을 하는 동안, 직원들끼리는 아주 사소하고 기억에도 남지 않을 일상의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 주말에 뭐 했어요? 그래서 지난번에 산 게임기는 재밌어요? 다음에 여행 갈 수 있게 되면 어딜 먼저 가고 싶어요? 핸드폰 바꾼 건 좋아요? 날씨가 좋아서 행복하다고요? 다음엔 어떤 집에 살고 싶어요? 그렇게 걸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 나의 질문과 대답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산책에 있어서는 꽤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디에도 집중하지 않고, 생각을 흩트릴 수 있는 작은 대화들이.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산책에 쓴 나의 300원과 30분이 그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는 생각을 한다. 긴 시간도 아니고, 격한 운동도 아니고,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간 것도 아니지만 살랑살랑 움직이는 옅고 여린 잎들과 서로의 일상을 담은 작고 사소한 말소리들이 신기하게도 톡톡한 휴식 시간이 되니까. 그렇다면 산책을 산책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봄이었을까, 길이었을까, 아니면 사소함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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