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 기억이 시작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책이 꽤 많았다.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책을 많이 사는 사람이었다. 나는 책보다는 롤러 브레이드나 경찰과 도둑에 더 관심이 많은 애였지만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책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애이기도 했다. 엄마가 책을 주문할 때면 종종 우리에게도 사고 싶은 책이 있냐고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에서 살아남기!> 같은 책을 사 달라고 부탁해 책 귀퉁이가 동글동글해질 때까지 읽고, 천 원짜리를 들고 만화책방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 읽으면서 자랐다.
만화를 제외하면, 나는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모양을 구경하는 게 더 좋았다. 책의 냄새, 크기, 무게, 모양, 표지의 색, 종이가 손에 닿는 질감이 좋았다. 전집이 빼곡하게 책장에 꽂혀 있으면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고, 책 구석구석에 그려진 그림들을 찾아내거나 괜히 책을 펼쳐 세워 놓고, 읽지 않아도 좋아 보이는 책들을 빌려놓고 책을 구경했다. 자취를 하면서도 좋아하는 책을 이것저것 사버린 바람에 이사를 할 때마다 애를 먹기도 했다.
내용이 아름다운 책은 어디에 인쇄해 놓아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겠지만 누군가의 생각을 잘 담아줄 수 있는 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아주 매력적인 일이다. 사진을 가지고 만드는 책, 물에 젖지 않아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읽을 수 있는 책, 엮이지 않고 낱장으로 만들어진 책들은 같은 책이어도 다른 재료와 형태로 만들어진다. 쓰임과 내용에 걸맞은 책의 다양한 모습들은 일반 서점보다는 독립 서점에서 볼 수 있는데, 처음 독립 서점에 방문해서 만났던 책의 귀여운 모습들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스페인에서 교환 학생으로 지낼 때에는 작은 이북 리더기를 구매해 전자책을 읽었다. 그 안에는 몇십 권 분량의 책이 들어 있었지만 작은 시집 한 권 정도의 무게밖에 되지 않아서, 한국어로 된 책을 구하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꽤 유용하게 사용했던 것 같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책이 있었다. 그가 연재했던 짧은 에세이들을 모아 엮은 책으로 귀엽고 재미있는 책이니 추천하고 싶다. 나는 보통 한 번 읽은 책을 또 읽지 않는데(게으른 탓이다), 함께 실린 삽화와 무라카미의 자잘한 이야기, 잡다한 지식들이 귀여워서 몇 번이고 읽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북 리더기를 들여다볼 일이 없어 한동안 그 책에 대해 잊고 지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을까,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책장에서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발견해 반가운 마음에 빼어 들었다. 그리고 이전에 이북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책의 모양새가 좋아서 놀랐다. 하드 커버에다가 책의 크기도 글과 꼭 맞는 판형이었고, 좋았던 삽화도 더 크고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진즉 이렇게 책으로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지금은 많은 정보를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고, 꼭 책이 아니어도 이야기는 전해진다. 흐르는 시간과 변하는 세상을 잘 타고 가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종이의 촉감, 갓 인쇄된 잉크의 냄새나 연필로 그은 밑줄 같은 것들이 주는 좋은 기분들은 역시 아날로그 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겠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책을 잘 골라내어 소중히 대해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