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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Aug 09. 2021

빛바래고 밑줄이 그어진

<책>

작업실에 놓아둔 책들의 표지가 모두 바래버렸다. 붉은색이었던 표지가 노르스름해지고, 파랗던 배경색이 왠지 좀 더 초록색에 가까워졌다. 짙은 검은색의 굵은 글씨들도 흰 바탕과 경계선이 흐려진 것처럼 보인다. 분명 기분 탓은 아니다. 책 등과 책 표지 부분의 색이 분명 같았었는데 책 등 부분이 눈에 띄게 노랗게 변해버린 것이다. 가장 밝고 좋은 공간에 놓아둔다고, 햇빛이 가득 차곤 했던 남향의 공간에 책을 모두 몰아둔 탓이었다.


햇빛이 이렇게나 강력하다고? 색이 변해버린 책들을 꺼내보며 웃음이 났다. 세월을 아주 급격히 지나온 모습에 어이가 없기도 했고, 그저 재밌기도 했다. 2020년도 책이나, 2000년대 책이나 이제 겉모습 가지고는 구분이 어렵게 되었다. 색이 바랜 책들의 모습에 속상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 나름대로 책들의 변화가 좋아서 다시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아직 어떤 책인지 구분할 수 있으니 되었다. 어차피 중고로 되팔 생각도 없었다.


작업실 이사 전의 책장. 이곳에서 책이 다 바랬다. 고양이 말고 책장만 찍은 사진은 없었다. 고양이 말고 책을 봐주시면 된다.


내 방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을 골라 작업실에 옮긴 뒤로는 새로 구매하는 책들은 모두 작업실로 향하게 됐다. 인터넷에서 굳이 집을 거치지 않고 작업실 주소로 바로 주문한다. 택배 박스를 뜯어 작업실 책장의 빈 곳에 한 권씩 새 책을 꽂아 넣어두다 보니, 어느새 신간 코너가 생겼다. 내가 산 책들도 있지만, 작업실을 함께 쓰는 친구들의 책들도 함께 꽂아 둔다. 그러다 서로 자주 묻는다. 이 책을 읽었냐고, 좋았냐고, 혹은 내가 다 읽었으니 이제 너도 읽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우리는 책장을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작업실의 책들엔 밑줄을 친다. 책에 밑줄을 치고 낙서를 하다니! 그렇게 기겁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우리끼리 보는 책이라 상관없다. 그냥 그러기로 했다. 책을 곱게 보는 데에는 소질이 없고, 어차피 가방에 넣고 다니다 이곳저곳 해지기 때문에 애초에 깨끗하게 책 읽는 것은 포기해 버렸다. 다만 누가 어떤 구절에 밑줄을 쳤고 메모를 한 것인지 구분이 가능하도록 다른 색의 볼펜을 사용할 것. 그 정도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문율이다.


분명 같은 책을 읽는데 우리는 다른 문장을 기억한다. 다른 부분에 감명을 받고, 때로는 의문을 제기한다. 나 이전에 쳐져 있던 밑줄을 보고 대뜸 친구들에게 묻기도 한다. 이거 너야? 오, 나랑 다르네. 그렇게 넘어간다. 때로 친구가 남긴 문장들을 보며 웃게 되기도 하고, 나도 그 아래에 댓글을 달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를테면, 웹툰에 댓글 다는 느낌이랑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 책보다 나는 작업실에서 바래고 해진 나의 책들이 더 좋다. 어떤 책엔 북 토크에 가서 작가님의 사인을 받아온 책도 있고, 오래도록 읽어 다 해져버린 에세이도 있고, 작업실에 온 친구들도 책을 빌려가 다섯 번 넘게 읽힌 소설들도 있다. 서로 선물한 책들에는 선물하며 남긴 짤막한 메모들이 남아있어, 조금 간지러울 때도 있다.


작업실의 책들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니까, 햇빛에 바랜 책들은 그저 낡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낸 시간들을 뜻하기도 하고 책에 쳐진 밑줄은 나의 과거이기도 하지만 친구들의 과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빛바래고 밑줄이 그어진 나의 책들은 아마 어느 정도 싸이월드 같은 느낌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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