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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채 Jun 29. 2024

[EP.5] 궤도는 과연 안정적인가

오사카 여행_3일차

  혼자 돌아다녀서 그런지 예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났다. 계획한 모든 장소를 다 들렀는데도 고작 오후 2시였다. 늦은 출발에 서두르기도 했지만 혼자다 보니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아 구경 시간이 꽤 단축됐다. 거기다 끼니마저 걸렀으니 일찍 끝날 만도. 여행이란 본디 유한한 행복이기에 남은 시간에 어디라도 더 가는 것이 당연하건대 어쩐지 의욕이 없었다. 지친 건가 싶어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겠다 일찌감치 오사카로 넘어가 쉴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아무래도 시간이 아까웠다.      


  고민 끝에 청수사에 들르기도 했다. 여행 시작 전 작성했던 여행 계획표에는 이동 동선에 따른 교통수단 정보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지하철 노선, 버스 번호, 승하차 위치 및 소요 시간 등 가능한 한 자세하게 작성해 두었는데 청수사는 당시 여건상 방문이 어려울 것 같아 제외했었다. 그렇기에 현장에서 바로 정보를 검색해 이동하다 보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진 않을까, 내릴 곳을 지나치진 않을까 염려되어 버스 탑승 후 잠시 정차했을 때 기사님께 다가가 여쭈었다. 파파고 번역기로 번역한 ‘청수사로 가는 거 맞나요?’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받고 한시름 놓았다. 이후 버스 기사님은 내가 신경 쓰였는지 홀로 청수사로 향하는 나를 살뜰히 챙겨주셨다. 목적지가 다가오자 눈짓으로 하차 신호를 보내주셨고 신호를 받은 나는 무사히 목적지에 하차했다. 감사한 마음에 꾸벅 인사를 드리고 내렸던 기억이 난다. 


  은각사와 달리 청수사는 길목부터 인파가 붐볐다. 사람들로 붐비는 곳에 오니 확실히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적한 분위기가 선사한 평화도 물론 좋았지만 어딘가 심심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북적이는 여행객을 보니 다시 마음에 활기가 돌았다. 오전에 갔던 아라시야마에서는 몰리는 인파가 부담스러워 한숨 돌리고 난리였으면서 이제는 또 활기차서 좋단다. 이 무슨 줏대 없는 마음인가 싶지만 모든 감정은 매 순간 진심이었다.      


  붉은 건물들이 매력적이었던 청수사는 무료 관람 구간까지만 둘러보고 사찰 주변에 조성된 니넨자카&산넨자카 길거리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 구경 의지는 애초에 거기 있었다. 더군다나 사찰 근처에는 일본 전통 의상 체험 인파를 비롯해 삼삼오오 모여서 즐기는 무리가 많았기에 괜히 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려 했기 때문이었다. 



  별천지였던 니넨자카&산넨자카. 관광객이 오가는 통로 양옆으로 즐비한 상점에는 도자기 그릇, 별사탕, 풍경, 피규어 등 다양한 잡화가 판매되고 있었다. 평소에도 기념품 상점 따위 구경을 선호하는 편이라 재미있었다. 뭐 하나 구매할까 싶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눈요기만 했다. 


  걷다 보니 스타벅스 교토점이 보였다. 건물 외관에서부터 물씬 풍기는 일본 전통 가옥의 향기. 찾아보니 내부 인테리어도 일본 전통 가옥 형태인 다다미 구조를 본떠 조성했다는데 궁금했지만 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 일행과 함께 올 날을 기약하며 지나쳤다. 일본의 옛 수도답게 곳곳에 예스러운 멋이 남아있었던 교토. 오사카와 사뭇 다른 고즈넉함과 정겨움에 큰 매력을 느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교토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은 오사카로 돌아와 도톤보리 근처 ‘사카에 스시’라는 곳에서 먹었다. 리버크루즈를 추천했던 친구가 알려준 가성비 초밥 가게였다. 초밥의 본고장에 방문한 만큼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곳에 가려 했었으나 알아본 곳은 우메다에 있어서 이동하기가 사나웠다. 이 또한 꼬인 일정 탓에 포기하게 된 것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친구의 추천을 따랐는데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횟감이 어찌나 두툼한지 살면서 여태 먹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워낙 초밥을 좋아하는지라 진탕 먹으려 했으나 계속 끼니를 거른 탓에 위가 줄어 12개밖에 먹지 못했다. 


  배가 불러 소화시킬 겸 한가로이 강 산책을 즐겼다. 두꺼운 코트 한 장으로도 충분한 초겨울 정도의 기온이었다. 견딜 만한 쌀쌀함이 피부에 기분 좋게 와닿았다. 3일 동안 줄곧 드나들어서 그런지 그새 풍경이 눈에 익었다. 당장 며칠 뒤엔 얼마나 그리워질는지 모를 풍경이 말이다. 


  호텔로 돌아와 중간보고 겸 가족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늦은 저녁 식사 중이라 다들 모여 있었다. 대견하다는 듯 바라봐주는 눈빛이 따뜻했고, 우리 언니 멋지다며 치켜세우는 동생의 엄지 손가락이 귀여웠다. 언제라도 든든한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밝은 얼굴로 통화를 마치고 다시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펑- 하고 터지는 기분이 들더니 왈칵 눈물이 터졌다. 


  거울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아닌 척 외면했던 감정들이 기회를 포착하고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우울해지고 말았다. 울면서 되뇌던 말은 ‘심심하다’였다. 하루 종일 양말에 구멍이 날 정도로 돌아다녔는데도 심심했다. 이런 식이라면 다음 날 가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았다. 오랜 염원 끝에 온 여행이자 소원 성취의 순간이 코앞인데 아무래도 공허했다. 혼자라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고, 혼자인 걸 지나치게 서글퍼하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옆에 사람 하나 없다고 이렇게까지 적적해하다니.      


  그러나 우습게도 한바탕 울고 나니 마음은 한결 가뿐해졌다. 눈물 따라 불순물도 게워졌는지 전보다 훨씬 명료해진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심심했다. 그러나 여전히 즐거웠다. 그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터놓고 말해서 지금 당장 짐 싸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애먼 서러움에 남은 재미까지 망쳐버리지 않도록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내일은 그토록 기다려왔던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가는 날이 아닌가. 기대만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더 이상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서둘러 씻을 준비를 했다. 욕조에 물을 받고 챙겨 온 입욕제를 던져 넣었다. 언젠가 친구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욕조가 없어 한참을 보관만 하다가 여행지에서 쓰려고 애지중지 챙겨 왔더랬다. (이것 때문에 일부러 욕조가 있는 숙소를 예약하기도 했고.) 우주선 모양의 입욕제에 물이 닿자 알록달록한 색들이 기세 좋게 수면 위로 뻗어나갔다. 우주선은 화려한 수면 위를 자유롭게 유영했고, 그가 지난 자리는, 그러니까 우주선이 지난 궤도는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했다. 


  과연 나를 태운 우주선은 지금 어디쯤 날고 있을까.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목적지는 분명할까, 궤도는 안정적일까? 오만가지 물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종국에 다다른 지점에선 나는 어떤 모습일까. 무슨 생각을 할까. 수많은 물음표가 형형색색의 수면 위로 흐드러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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