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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채 Jun 08. 2024

[EP.4] 혼자를 견디는 일

오사카 여행_3일차

  교토 가는 날 아침. 보통 오사카 여행을 오면 하루 정도는 당일치기로 교토를 다녀오더라. 그래서 나도 일정 중에 교토를 추가했다. 아무래도 당일치기이다 보니 대체로 아침 일찍 이동하기에 나 또한 그럴 예정이었지만, 연이틀 누적된 피로에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여행인지 고행인지. 겨우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을 때는 계획상 이미 교토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괜히 속상해진 마음을 안고 도착한 아라시야마. 원래 텐류지까지 천천히 걸으며 주변 구경도 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급해서 서둘러 목적지로 향했다. 사찰과 정원을 모두 둘러볼 예정이었으므로 통합입장권을 요청했으나 소통 오류였는지 정원 구경만 가능한 입장권으로 잘못 발권되었다. 곧바로 알아차리고 재발권을 요구했으나 직원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추가 요금 더 내겠다는데 왜 거절하는 거지. 납득이 되지 않아 항의도 해보았지만 대놓고 대화를 거부하기에 포기하고 돌아섰다. 어차피 내 목적은 소겐치 정원에 있었으니까 그냥 참기로 하긴 했는데 억울했다. 본의 아니게 절반만 구경하게 됐지 않나. 가뜩이나 속상한데 이런 일까지 생기니 더 허탈했다. 아쉬운 마음에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봤는데 다행히(?) 굳이 들르지 않아도 될 만큼 별 감흥 없더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게 뭐라고 위안이 되는지. 마치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 속 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기대했던 소겐치 정원은 겨울이라 앙상한 나뭇가지가 살짝 아쉬움을 남겼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거울처럼 맑은 수면 위로 투명하게 비치는 풍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는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서둘러 이동해야 하는 구조였다. 정해진 동선으로 이동해야 해서 오랫동안 길을 막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치쿠린(대나무숲)까지 이어지는 동선이라 텐류지를 찾은 사람들과 계속 같이 움직였다. 종종 사람들이 너무 몰린다 싶으면 잠시 샛길로 빠져 숨을 돌렸다. 삼삼오오 어울린 무리 틈에 끼어있다 보면 급격히 지치는 순간이 더러 찾아왔기 때문이다. 체력은 괜찮은데 마음이 묘하게 버거운 순간이 간혹 있었다.

 

  치쿠린(대나무숲)에 들어서니 쭉쭉 뻗은 대나무가 온 시야를 메웠다. 일부 한국인 여행객들로부터 담양 죽녹원과 비교하는 이야기가 심상게 들려왔으나 당시만 해도 죽녹원에 가 본 적 없었던 나는 당장 눈앞의 이 대나무숲도 제법 울창하고 웅장하다고 생각했다. 대나무숲 자체가 처음이라 살짝 설레기도 했다. 그래서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었는데 주변에 사진 찍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살짝 민망한 기분에 부탁은 하지 못하고 혼자 셀카봉으로 대충 찍었다. 이 순간 내가 이 공간에 있음을 기록하는 데 의의를 두는 정도로만 말이다. 그러나 막상 사진을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애매한 구석에서 어정쩡하게 찍은 사진이라니. 어쩐지 스스로가 안쓰럽다가도 기특하고 대견하다가도 애잔해지는 기분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은각사로 넘어가기 전 간식으로 당고를 사 먹었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당고 가게가 있었다. 만화 <다! 다! 다!>에 나오는 베이비 시터 ‘바바’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인 당고. 당고를 향한 나의 궁금증은 순전히 ‘바바’ 때문이었다. 국내에선 떡꼬치로 순화되어 방영되었으나 실제는 일본의 전통 음식 ‘당고’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 늘 궁금했는데 드디어 맛을 본다. 꼬치에 꽂힌 동그란 떡 3개.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표면 위로 걸쭉한 간장 소스가 양껏 부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말랑하고 쫀득해 보이는 귀여운 생김새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연 맛은 어떨까.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그토록 좋아했을까. 만화 속 ‘바바’가 먹을 때마다 지었던 황홀한 표정을 생각하며 한 입 베어 물었고, 바로 깨달았다. 나와 ‘바바’는 입맛이 달랐다.      


  오묘한 맛의 당고를 뒤로하고 은각사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랬는지 오는 내내 거리에 사람이 없어 살짝 불안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한산했던 거리. 나름 유명한 관광지라고 알고 왔는데 아니었나, 괜히 온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 때쯤 기념품 상점이 밀집한 골목이 보였다. 맞게 왔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동생에게 줄 말차 초콜릿 한 상자를 샀다.      


  입장권이 굉장히 예뻤던 은각사. 기념품으로 간직해도 좋겠을 듯했다. 으레 관광지 입장권과는 다르게 잘 갖춰진 모양새가 감탄스러웠다. 은각사는 잘 가꿔진 고즈넉한 사찰이었고, 마당에는 파도를 형상화한 모래 조형물이 있었다. 물에도 녹지 않고 쓸려 내려가지도 않는다는데 모래가 과연 그렇게까지 견고할 수 있는 걸까. 폭우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작은 알갱이가 모여 일궈낸 힘이 저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꽤 흥미로웠다.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옹골찬 자태였다.        


  찬찬히 둘러보다가 언덕으로 이어진 둘레길을 걸었다. 비가 내린 뒤 살짝 마른 땅에서 나는 발소리가 자박자박 듣기 좋았다. 관광객이 몰릴 땐 줄을 지어 이동한다던데 애매한 시간을 잘 맞춘 덕에 평화롭게 즐겼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나무 사이로 사찰의 전경과 그 너머 교토의 어느 마을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비 내린 뒤 느껴지는 특유의 청명함이 마음마저 깨끗하게 닦아내서 단 한 번도 시끄러웠던 적 없는 사람처럼 마음이 넉넉하고 고요해졌다. 이대로만 있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동생 생각이 났다. 나 못지않게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아이라서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웬일인지 연결이 쉽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아 간신히 연결된 통화도 자주 끊기거나 화질이 엉망이었다. 결국 실속 없는 짓이란 생각에 결국 포기했다. 아쉬운 대로 찍어둔 사진과 영상을 전송하는 방식을 택했다. 어차피 조금 전에 찍은 것들이라 생생한 건 매한가지지만 왜 그렇게 아쉬운지 영문을 모르겠더라. 고요하게 가라앉은 마음에 묘한 파동이 일었다. 그렇게 은각사 구경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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