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이 말하는 것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들고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았다.


봉투를 뜯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열어보면 알게 될 것들이 있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모른 척한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결과는 예상보다 좋지 않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키였다.

이 년 전보다 줄어 있었다.

몇 센티미터. 별것 아닌 숫자다.

그런데 묘하게 충격적이었다.

키가 줄어든다는 것.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나이가 들면 척추가 눌리고,

디스크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고, 그래서 키가 줄어든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막상 숫자로 확인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시력도 떨어졌다. 체중은 늘었다.

이 년 전에는 정상 범위였던 수치들이

슬금슬금 경계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작은 경고등이 켜져 있었다.

당장 큰 문제는 아니지만, 이대로 가면 좋지 않다는 신호들이었다.


물론 이유는 안다.

최근 몇 달간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마셨다.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돌보지 않았다.

핑계를 대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핑계는 핑계일 뿐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결과지를 들여다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숫자로 확인하니 달랐다.

거울을 볼 때는 잘 모른다.

매일 보니까. 조금씩 변해가는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어제의 얼굴과 오늘의 얼굴은 거의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 년 전의 숫자와 지금의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피할 수 없는 증거처럼.


서글펐다.


당연한 일인데도 서글펐다.

누구나 겪는 일인데도 서글펐다.

내가 특별히 불행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건강이 나쁜 것도 아닌데, 그냥 서글펐다.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되는데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이런 감정은 처음이 아니다.

열 살에서 스무 살이 될 때도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이 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른에서 마흔, 마흔에서 쉰. 매번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매번 그것이 조금씩 아팠다.

당시에는 큰일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지금 돌아보면 별것 아닌 경우도 많았다.


정확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는 지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된다.

당시에는 분명히 아팠는데, 지금 돌아보면 흐릿하다.

아마 지금 이 서글픔도 몇 년 후에는 희미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다른 서글픔이 찾아와 있겠지만.


결국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게 스스로를 바꿔가는 것.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과정에서 약간의 고통이 따르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을 버티고 나면 또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것이다.

스무 살 때는 금방 털어냈다.

서른 살 때도 며칠이면 괜찮아졌다.

지금은 조금 더 오래 걸린다.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것도 그 과정의 일부다.


그래도 검진을 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받기 전에는 귀찮았다.

시간도 걸리고, 비용도 들고,

결과를 보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서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미룬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른 척하면 이자가 붙는다. 작은 문제가 큰 문제가 된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 같다.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없다.


이번 검진으로 치료가 필요한 곳이 몇 군데 발견되었다.

당장 큰 문제는 아니지만, 방치하면 나빠질 것들이다.

앞으로 몇 달간 여기저기 병원을 다녀야 할 것 같다.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다. 번거로운 것과 필요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창밖을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키가 줄었다고 해서 내가 줄어든 것은 아니고,

체중이 늘었다고 해서 내가 무거워진 것도 아니다.

시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생긴 것도 아니다.


다만 관리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몸이 보내는 메시지다.

무시하지 말고, 귀찮아하지 말고, 하나씩 챙겨야 한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병원 예약부터 해야겠다.


서글픈 것은 서글픈 것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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