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흐르는 한, 계속해서 춤을..

30년의 시차를 지나 다시 펼친 책

나트랑의 공기는 점심때의 식은 수프처럼 미적지근하게 살갗에 달라붙는다.

호텔 테라스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계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는 일조차 무의미해진다.


30년 전, 먼지 날리는 부대 연병장 한구석에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를 이곳에서 다시 펼쳤다.

1995년의 청년과 2026년의 중년.

그 사이에는 거대한 사막과 몇 번의 홍수가 있었지만,

소설 속 문장들은 기묘하게도 퇴색되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과거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이루카 호텔'이라는 기묘한 장소로 돌아간다.

나에게는 이 낯선 도시가 나만의 이루카 호텔이다.


소설은 '4년'이라는 시간의 매듭을 반복해서 말한다.

익숙했던 공간을 떠나 조촐한 가치관에 기초한

새로운 생활을 쌓아 올리려 고군분투한 시간 역시 정확히 4년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성실하게 삶의 잡동사니들을 모아

현실과 나 자신을 연결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질서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것이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과거의 잔상이 끈질기게 발목을 잡았고,

나는 그 그림자를 떼어내기 위해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을 운명에 지불해야 했다.


어둠 속에서 양 사나이는 주인공에게 말한다.


"여기가 당신을 맺어주는 매듭인 거요.

잃어버린 것들,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

그것들이 여기를 중심으로 모두 연결된 거요."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내가 맺어온 수많은 연결의 매듭을 떠올렸다.

어떤 매듭은 너무 꽉 조여져 피가 통하지 않았고,

어떤 매듭은 헐거워져 제 기능을 상실했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배전반에서는

가끔 고르지 못한 전류가 흘러 불꽃이 튀기도 했다.

누군가와의 관계는 마치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서로의 말들을 갉아먹었고,

어떤 인연은 서로의 중력이 너무 강해 궤도 자체를 뒤틀어버리기도 했다.


데이터가 부족한 탓인지, 혹은 무엇인가 결여된 탓인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갔다.

그들은 내 안의 성실함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방을 나갈 때는 들어올 때보다 훨씬 서글픈 표정으로

자신의 무엇인가를 마멸시킨 채 사라져 갔다.

나는 그들의 부재를 방구석에 쌓인 먼지처럼 인식하며 홀로 남겨졌다.


"어째서 언제나 내가 남게 되는가?"


소설이 던지는 이 시린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나트랑의 새벽길을 달리고

인피니티 풀의 작은 공간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굳어진 근육을 깨운다.


가장 강렬하게 내면을 파고든 대목은 양 사나이의 조언이다.


"춤을 추는 거요. 음악이 울리고 있는 동안은 어떻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의미 같은 건 생각하지 마.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멎어."


일상의 반복 속에서 육체가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마비이자 존재의 정지였다.

그 굳어버린 조직들을 조금씩 풀어내기 위해

이곳에서 나만의 스텝을 밟는다.

낯선 음식을 입에 넣고, 정해진 시간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읽지 않던 종이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멈춰버린 삶의 배경음악을 다시 재생하는 의식이다.


30년 전의 나는 이 문장들을 관념적으로 이해했지만,

지금의 나는 온몸의 감각으로 통과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하와이의 공항에서

긴장이 소멸한 유키의 표정을 보며 느꼈던 그 해방감을 나 역시 느낀다.


"이 아이는 지금까지 정말 지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구나."


소설 속 인물에게 던지는 시선인 동시에,

그동안 타인의 시선과 요구라는 외투를 껴입은 채 땀을 흘리던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안쓰러운 고백이다.

누군가의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를 정의당하던 시간들이 바닷바람에 흩어진다.


이제 휴가는 끝을 향한다. 하지만 춤은 끝나지 않는다.


현실로 돌아가면 다시 견고한 일상의 벽면과 마주할 것이다.

주행 속도가 맞지 않는 자동차처럼 덜컹거리는 관계들,

다시 어둠의 세계로 끌어당기려는 해묵은 습관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전처럼 발을 멈추지 않는다.

음악이 흐르는 한, 다들 감탄할 만큼 성실하고 훌륭하게 내 몫의 스텝을 밟을 것이다.


나트랑의 시계 바늘이 현실의 시간에 맞춰 천천히 회전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늘은 앞으로 나아간다.


"현실이다, 나는 여기에 머무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덮으며

나의 현실로 복귀할 채비를 마친다.

상실된 것들을 위해 울고,

아직 상실되지 않은 것들을 위해 다시 춤을 출 준비를 한다.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기운차게 춤추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이동하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