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 말하기로 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기 시작한 날

언젠가부터 습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상대방이 기분 나빠 보이면 일단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어도 그랬다.

그래야 상황이 빨리 정리되었으니까.

그래야 불편한 침묵이 끝났으니까.


돌이켜보면 그건 사과가 아니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주문 같은 것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누그러졌고,

나는 더 이상 불편한 감정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게 편했다. 당장은 그랬다.


문제는 그 습관이 쌓이면서 생겼다.

함부로 미안하다고 하니

상대방은 내가 늘 잘못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했다.

갈등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내 탓이 되었다.

시작은 그게 아니었는데, 결론은 항상 그쪽으로 흘러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의 균형이 기울어졌다.


어떤 사람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내가 쉽게 미안해하니까,

조금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 내가 알아서 굽혀 들어왔으니까.

그게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양보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게 당연해졌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사람이 있었다.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고마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관계가 부담스러워졌다.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이 뒤섞이면서 경계가 무너졌다.

고마움이 의무가 되고, 의무가 착취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처음에는 작은 것들이었다.

밥을 사고, 커피를 사고, 가끔 이것저것 비용을 부담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움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 범위가 조금씩 넓어졌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감당해야 할 영역이 처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불편했지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말하면 관계가 어색해질 것 같았다.

그동안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좀 참아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갔다. 한 번, 두 번, 계속.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대화 중에 불편한 표현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말을 자제해달라고.

큰 요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한 가지 표현만 조금 신경 써달라는 것이었으니까.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상대방은 내가 시비를 건다고 받아들였다.

대화는 급격히 틀어졌고, 과거의 일들이 꺼내졌다.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들이 무기처럼 날아왔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대화가 끝났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먼저 연락했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예민했다고.

그래야 불편한 감정이 끝나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으니까.

정당한 요청을 했을 뿐이었으니까.


경계를 세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수 있다.

관계가 어색해질 수 있다.

당장 불편한 감정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넘어간다.

나도 오랫동안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간 것들이 쌓이면

관계는 점점 기울어진다.

한쪽만 참고, 한쪽만 양보하는 구조가 고착된다.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가더라도 건강하지 못하다.


지금은 다르게 하려고 한다.


함부로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

고마움은 짧게, 요구는 명확하게 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한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예의는 지키되, 할 말은 한다.


쉽지 않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불편한 감정을 바로 해소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이게 관계를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나를 계속 희생하면,

결국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관계도, 나 자신도.


정확하게 말하기로 했다.


내가 불편한 건 불편하다고.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게 관계를 끝내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더 오래 함께하기 위한 것이다.


건강한 관계는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경계는 정확한 말로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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