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만화가 건넨 한 마디
책장을 정리하다가 낡은 만화책 한 권이 손에 걸렸다.
타카하시 히로시의 『워스트』.
약 20년 전에 샀던 책이다.
페이지가 누렇게 바랬다.
대충 넘기다가 어느 장면에서 손이 멈췄다.
'토라'라는 조연이 하숙집 주인(형님이라고 해야할까? 하여튼 어른)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이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요. 안그래요?
우리 하숙집의 다른 녀석들은 동물에 비유하면 호랑이나 늑대 아닙니까.
그런데 나만 토끼나 다람쥐... 몸집도 작고.. 배짱도 없고.. 이런게 어딨어요...?
강해지고 싶어서 중학교때는 공수도도 배웠습니다.
하지만 겨우 한달 만에 힘들어서 포기하고...
정말 대책이 없어요.."
이에 대한 '형님'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일어서라."
토라가 일어섰다.
"눈 감아."
토라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형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을 부러워하지 마라.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거야.
그래서는 평생 비참한 인생을 보내게 된다.
강해지고 싶다는 건 좋아.
하지만 그건 남과 비교할 게 아니야.
남은 남, 나는 나.
인생의 모든 해답은 자기 안에 있어.
알았냐, 토라!"
"인생의 모든 해답은 자기 안에 있어."
만화책을 덮었다. 창밖으로 겨울 햇살이 비쳤다.
삼십 대의 나였다면 이 장면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당시엔 비교할 게 너무 많았다.
동기들 중 몇명은 대형 로펌에서 억대 연봉을 받았다.
선배들은 유명 사건을 맡아 뉴스에 나왔다.
나는 작은 사무실에서 소액 사건을 처리하며 버티고 있었다.
왜 나만 이 모양인가.
토라처럼 그런 생각을 달고 살았다.
지금은 다르다.
비교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게 됐다.
억대 연봉을 받던 동기 중 몇은 번아웃으로 쓰러졌다.
유명했던 선배 중 몇은 건강을 잃었다.
반대로 눈에 띄지 않게 제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이 오히려 오래갔다.
성공의 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기준 자체가 각자 다른 것이었다.
어느 날 의뢰인 한 분이 상담을 왔다.
사업이 망해서 파산 신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분이 말했다.
"같이 시작한 사람은 잘나가는데, 저만 이 꼴입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전 만화에서 읽었던 말을 꺼냈다.
"남을 부러워하면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선생님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느냐입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 그건 선생님 인생과 상관없어요."
그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산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면책 결정이 나던 날,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이번엔 비교하지 않고 제 속도로 가겠다고.
비교는 습관이다.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 어렵다.
SNS를 열면 남들의 성공담이 쏟아진다.
동창회에 가면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자연스레 귀에 들어온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보는 것은 남의 인생 전체가 아니다.
편집된 하이라이트일 뿐이다.
그 뒤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남들이 내 삶을 보면 나름 괜찮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의 고민과 불안은 나만 안다.
만화책을 책장에 다시 꽂았다.
'인생의 모든 해답은 자기 안에 있다.'
이 말이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십 년 전에 읽었을 때와 지금 읽었을 때,
그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살아온 시간만큼 말의 깊이가 달라진다.
토라는 그 후로 어떻게 됐을까.
만화 속에서 그는 조금씩 강해졌다.
물론 여전히 몸집은 작았고, 남들보다 느렸다.
하지만 더 이상 비교하지 않았다.
자기 방식대로 싸웠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다.
남의 경기장에서 남의 규칙으로 싸우면 진다.
당연하다. 그건 내 싸움이 아니니까.
내 경기장에서, 내 규칙으로, 내 속도로 싸워야 한다.
그래야 이기든 지든 후회가 없다.
비로소 알게 됐다.
해답은 밖에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안에 있었다는 것을.
다만 바깥만 두리번거리느라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는 묻지 않는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대신 묻는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냥 해본 소리다. 얼른 집에 가야겠다.
만화 속의 형님처럼.
Copyright Notice 본 포스팅에 인용된 만화 『WORST(워스트)』 3권의 저작권은 작가 타카하시 히로시(Hiroshi Takahashi) 및 원저작권자와 해당 출판사에 있습니다. 본 게시물은 저작권법 제28조(공표된 저작물의 인용)에 따라 비평 및 리뷰를 목적으로 핵심 장면 일부를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