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마음이 관계를 망치는 방법
얼마 전 베란다에서 화초 하나를 버렸다.
잎이 누렇게 변하고 줄기가 물러져 있었다.
처음에는 병이 든 줄 알았다. 아니었다.
물을 너무 많이 준 탓이었다.
뿌리가 썩어 있었다.
좋아서 준 물이 결국 그 화초를 죽인 셈이다.
죽은 화초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서 있었다.
흙 냄새가 났다. 축축하고 퀴퀴한, 썩은 것들의 냄새.
화분을 들고 현관으로 나가면서 문득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고백하자면
나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주 실패를 경험했다.
그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이어서, 무례해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고, 문제는 저쪽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패턴이 반복되자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매번 비슷한 일을 겪는가.
한두 번이면 운이 나빴다고 치부할 수 있다.
세 번, 네 번 반복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통분모는 저쪽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곰곰이 돌아보니 답이 보였다. 다만 불편한 답이었다.
나는 관계 초반에 지나치게 베푼다.
시간도, 돈도, 감정도 아끼지 않았다.
요청받기 전에 먼저 주었다.
불편해 보이면 해결해주고, 어려워 보이면 도와주었다.
밥값은 늘 내가 냈다.
이동 비용도, 필요해 보이는 물건도.
그게 좋은 관계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계속 주다 보면 한계가 온다.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무한정 줄 수는 없다.
시간이 부족해지고, 재정이 빠듯해지고, 감정이 소진된다.
호의는 점점 줄어들고 결국 멈추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지속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어제까지 해주던 것을 오늘 안 하면 그 사람은 당황한다.
왜 갑자기 달라졌느냐고 묻는다.
내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의무가 아니었다. 호의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줬는데.
하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처음부터 그렇게 해줬으니 그게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설정한 기준이었다.
요구받은 적 없다.
내가 먼저 제시했다.
그 기준이 바뀌는 날,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어디서 이런 습관이 생겼을까.
아마도 오래전부터였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더 주고 더 베풀었다.
주면 줄수록 나를 좋아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라고, 우정의 방식이라고 착각했다.
돌이켜보면 일종의 투자 심리와 비슷했다.
많이 투자했으니 많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기대.
문제는 그 기대를 나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혼자 쌓아놓고 혼자 실망한다.
실망이 쌓이면 원망이 된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왜 나한테 이러느냐고.
하지만 그쪽은 영문을 모른다.
그렇게 해달라고 한 적이 없으니까.
최근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거리를 두기로 했다.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받은 관계였다.
그 사람 덕분에 배운 것도 많았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챙겼다.
내가 좀 더 여유가 있었으니까.
고마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범위는 넓어지고 요구는 많아졌다.
언제부턴가 그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
마음속에서 불쾌함이 올라왔다.
왜 불쾌한지 생각해봤다.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그런 구조를 만들었다.
처음에 과하게 주었고, 그것이 기준이 되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베란다의 화초와 다를 게 없었다.
빈 화분이 베란다 한쪽에 놓여 있다.
새 화초를 들일 생각은 없다.
당분간은 그대로 두려고 한다.
그 빈 화분이 일종의 표지판처럼 느껴져서다.
지나칠 때마다 한 번씩 생각하게 된다.
좋은 마음도 과하면 독이 된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화초는 썩는다.
아무리 좋은 물이라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창밖으로 겨울 햇살이 들어온다.
마른 흙 위로 빛이 천천히 번진다.
화분은 비어 있지만,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그 빈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채우는 것보다 비워두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