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기를 지우며
목요일 밤이었다.
별다른 할 일이 없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드디스크 정리를 하기로 했다.
몇 년째 손대지 않은 폴더들이 깊숙한 곳에 쌓여 있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폴더를 하나씩 열어보며
필요 없는 것들을 지워나갔다.
대부분은 미련 없이 삭제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스크린샷,
한 번 쓰고 방치한 서식 파일,
다운받아놓고 읽지 않은 PDF.
그러다 작은 텍스트 파일 하나가 눈에 걸렸다.
확장자는 .hwp, 용량은 고작 몇 킬로바이트.
파일명에는 날짜만 적혀 있었다.
열어보기 전까지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일기였다.
아마도 사무실을 열기 전후의 시기였던 것 같다.
정확한 연도는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다만 글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인물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글을 쓴 사람의 목소리가
어느 시절의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세금이 예상보다 커서
급여를 제때 지급하지 못한 날의 기록이 있었다.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이는데 다음 달 고정비를 어떻게 맞추나,
계산기를 두드리며 쓴 문장도 있었다.
내일 재판에서 변론요지서를 늦게 냈다고 욕먹지 않을까,
혹시 내가 잊고 있는 중대한 사실이 뒤늦게 터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적어놓은 밤도 있었다.
그리고 매번 글의 마지막에는
거의 판에 박은 듯이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버티자. 조금만 더 버티자. 할 수 있다.
그 문장들을 읽는 동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
숨을 쉬는 것조차 의식해야 했던 그 시절 특유의 긴장감.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보다 먼저.
모니터를 잠시 응시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 일기의 주인공은 꽤 열심히 살고 있었다.
부족한 것 투성이였지만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통장이 바닥을 보이면서도 "희망은 있다"고 적었고,
주저앉고 싶은 밤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나를 용서한다"고 써넣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줄과 줄 사이에서 읽혔다.
대견했다.
하지만 그 일기를 더 읽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대견함보다 불쾌함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을 다시 체험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귀중한 기록이라 해도, 반가운 일은 아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 파일을 어딘가에 소중히 보관했을 것이다.
외장 하드에 복사하거나, 클라우드에 올려두거나.
언젠가 다시 꺼내볼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달랐다.
마우스를 파일 위에 올렸다. 잠시 멈췄다.
그리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휴지통도 비웠다.
화면에 짧은 게이지가 스르르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후회가 밀려오지 않았다.
가끔 생각한다. 과거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과거를 '자산'이라고 말한다.
경험이 쌓여 지혜가 되고, 실패가 모여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 일기 속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여기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냉장고 안쪽에 오래 밀려 있던 식재료처럼,
열어볼 때마다 당시의 고통이 고스란히 복원되는 기록이 있다.
그런 기록은 더 이상 영양분이 아니다.
자산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것이다.
10년에 한 번 꺼내서 읽는 정도라면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자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게 어떤 심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안정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경력이 쌓인 만큼 책임도 커졌고, 해결해야 할 문제의 종류도 달라졌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시절만큼 불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매일 밤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일은 어떻게 될까'를 되뇌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꽤 먼 거리를 걸어온 셈이다.
그 거리를 걸어올 수 있었던 건 분명 '그때의 나' 덕분이다.
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고마움과 보관은 별개의 문제다.
내게 있어 과거란 어느덧 이런 존재가 되어 있다.
좋았던 기억도, 좋지 못했던 기억도,
시간과 에너지를 써가며 보관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꼭 가져가야 할 것이 있다면
최소한만. 정말 최소한만 남기고 싶다.
그 최소한의 의미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원본은 모두 지운다.
방 안이 조용했다.
어디선가 환풍기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마지막으로, '그때의 나'에게 한마디만 전하고 싶다.
수고 많았다. 잘 버텨줘서 고맙다.
덕분에 지금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별일 없이, 담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겠다.
모니터를 껐다.
검은 화면 위로 방 안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폴더는 텅 비어 있었다.
방 안이 조금 넓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