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에 나는 호텔을 예약했다.
한 달짜리 월세 방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낡은 비즈니스호텔.
보증금과 한 달치 임대료를 합해 이백만 원쯤 되었다.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망설이지는 않았다.
예전에 한번 싸구려 고시원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매일 밤 편의점 소주를 두 병씩 마시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이 밤마다 조금씩 넓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 곳에 가면 또 그렇게 될 것이 분명했다.
예약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주머니 속 집 열쇠가 손끝에 닿았다.
톱니 모양의 차가운 금속.
8년 동안 매일 돌렸던 열쇠였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은 쌓여 있었다.
하지만 한 줄도 읽히지 않았다.
글자들이 제각각 흩어져서 의미를 이루지 못했다.
그녀와 결혼한 것은 8년 전이었다.
내가 서른다섯이고 그녀가 서른한 살이던 해.
결혼 전부터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밤부터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불안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껐다가 다시 켜기도 귀찮아서 그냥 틀어놓는 것.
그런데 해가 갈수록 그 음량이 커져갔다.
나는 일을 했다. 돈을 벌었다.
번 돈의 대부분을 집에 가져다주었다.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보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오기는 했다.
다만 그것은 대답이라기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것이었다.
말과 말 사이에 놓인 길고 차가운 공백.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유리를 통과하는 빛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집에서의 나는 기능이었다.
밖에서 돈을 가져오는 기능.
고장이 나도 아무도 수리하지 않는 기능.
다만 멈추면 곤란한 기능.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왔는데 현관에 내 신발이 없었다.
그녀가 신발장 안쪽으로 넣어둔 것이었다.
손님이 온다고. 내 신발이 지저분해서.
나는 양말 바닥으로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거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웃음소리.
내가 들어온 것을 알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이혼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현관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은 내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에게도 좋은 면이 있었다.
없었다면 8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 그녀는 웃었고, 그 웃음은 진짜였다.
아이가 아플 때 밤새 안아주던 모습도 기억한다.
나와 함께 오래전 여행했던 작은 도시의 골목도.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였다.
아니, 별개가 아니라 하더라도.
좋은 면이 있다는 사실이 나머지를 소거해주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 앉아 나는 오래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며칠 싸우고, 내가 사과하고, 다시 조용해지고.
그녀는 아마 오늘 저녁쯤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할 것이다.
예전에도 항상 그랬으니까.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그러다 또 폭발하고.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매번 조금씩 더 닳아갔다.
상대방은 나의 가장 약한 지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었다.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옷 몇 벌, 세면도구, 노트북.
서랍에서 여권을 꺼내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왜 여권을 챙기는지 나도 잘 몰랐다.
당장 어디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것이 내 이름이 적힌,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현관에 서서 신발을 신었다.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집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가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문을 열자 12월의 공기가 들이닥쳤다.
차가운 것을 넘어서 날카로운 공기.
그것이 코끝과 귀를 찔렀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치고 한 발을 내디뎠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멈출 것 같았다.
멈추면 다시 들어갈 것 같았다.
들어가면 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주머니 속 열쇠를 만졌다.
아까와 같은 감촉이었다.
하지만 오후에 만졌을 때보다 무거운 것 같았다.
호텔까지는 차로 이십 분이었다.
밤길은 한산했다.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라디오를 켰다가 바로 껐다.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갔다.
열두 평짜리 방.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
욕실은 좁았지만 깨끗했다.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별것 아닌 풍경이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끝에 앉았다.
텅 빈 방이었다.
냉장고도 비어 있고, 옷장도 비어 있었다.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째선지 울음이 나올 것 같았는데 나오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이상한 감각이 찾아왔다.
귀가 멍멍한 것 같기도 하고,
비행기가 착륙한 직후처럼 기압이 바뀐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욕실로 갔다.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훑고 내려갔다.
거울 속의 남자는 피곤해 보였다.
눈 밑에 그늘이 져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곰팡이는 없었다.
깨끗한 흰색 천장.
어딘가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것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
밥을 먹어야 한다. 세탁기를 찾아야 한다. 출근을 해야 한다.
그런 당연한 것들이 갑자기 전부 낯설어졌다.
사십 년 넘게 살아왔는데, 혼자 사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있으니까.
눈을 감았다.
탁자 위에 집 열쇠와 호텔 카드키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내가 떠나온 곳의 것이고,
하나는 내가 도착한 곳의 것이었다.
잠이 왔다. 오랜만에 술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