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냉장고에 남겨진 음료 한 병
시월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오후 세 시쯤, 사무실 창 너머로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는데,
옆자리 직원이 전화를 받더니 자리를 비웠다.
복도 쪽으로 나가며 목소리를 낮추는 게 보였다.
예전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넘겼을 장면이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왜 굳이 밖에 나가서 받지.
왜 목소리를 낮추지.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가슴팍 어딘가가 미세하게 조였다.
근거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사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십 년 가까이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비슷한 일을 몇 차례 겪었다.
한 직원의 근무 태도를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직원이 다른 사람들까지 끌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출근하니 책상 여러 개가 비어 있었다.
또 한번은 오래 믿고 맡겼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그쪽 일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나름대로는 최대한 배려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다.
그 일들이 지나간 뒤에도, 사무실 문을 열 때마다
빈 책상이 먼저 눈에 들어오던 시기가 한동안 있었다.
경력이 쌓이면서 그런 일은 거의 사라졌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달라졌고,
관계의 적정한 거리도 배웠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해 가을, 잠을 못 자는 밤이 며칠 이어지고,
일이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들이 겹치면서,
잊었다고 믿었던 감각이 돌아왔다.
오래된 상처가 새 이유를 만나면,
의심은 기억보다 빠르게 퍼진다.
회의 중에 누군가 말을 아끼면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느꼈다.
직원들끼리 복도에서 잡담을 나누다가
내가 지나가면 멈추는 것 같았다.
실제로 멈춘 건지, 내가 그렇게 느낀 건지는 지금도 모른다.
의심이라는 렌즈를 끼면
평범한 장면들이 전부 수상해진다.
같은 풍경인데 색이 달라진다.
그 무렵 읽고 있던 책에,
마음의 균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렸다. 다만 한 문장이 오래 남았다.
어떤 감정이든 극단으로 가면,
결국 그 감정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상황을 불러온다는 취지였다.
책을 덮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불편했다.
나한테 해당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나는 사람들을 의심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차갑게 굴고 있었다.
아침 인사의 톤이 딱딱해져 있었다.
보고를 받을 때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서류만 바라봤다.
회식 자리에서도 예전처럼 편하게 웃지 못했다.
의심이 태도를 바꾸고,
태도가 분위기를 바꾸고,
분위기가 관계를 바꾸고 있었다.
사람들이 실제로 떠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문을 닫고 있었다.
그때 내가 한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 날 출근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냉장고 앞에서 잠깐 서 있다가,
내가 마실 것 하나와 캔 하나를 더 집었다.
밀크티였다.
먼저 와 있던 직원이 단 것을 좋아한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그 직원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드세요." 그것뿐이었다.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맙다고 했다.
짧은 웃음이었는데 어색함이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그 짧은 순간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며칠간 돌아가던 시나리오들이
밀크티 캔 하나에 묻혀 좀 우습게 느껴졌다.
내 머리가 지어낸 이야기보다,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 더 정확했다.
사람을 완전히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순진함이지 신뢰가 아니다.
확인할 것은 확인하고, 말할 것은 말해야 한다.
다만 그 과정의 바탕에 무엇을 깔아놓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의심 위에 확인을 올리면 심문이 된다.
신뢰 위에 확인을 올리면 점검이 된다.
같은 질문인데 표정이 다르고,
같은 대답인데 해석이 달라진다.
마음속에 늑대를 키우면 늑대가 자란다는 말이 있다.
그 책에서 읽은 건지, 다른 데서 본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가을 이후로,
의심이 고개를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습관이 생겼다.
지금 이것은 상대방의 문제인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인가.
대부분은 후자였다.
후자라는 걸 인정하고 나면, 다음 행동은 의외로 간단하다.
편의점에 들르든, 먼저 인사를 건네든, 수고했다는 말을 한마디 붙이든.
늑대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방법은 그렇게 소박한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