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
옷장을 정리하다가 양복 한 벌이 나왔다.
언제 산 건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깨 폭이 지금의 내 체형과 맞지 않았다.
한때는 이 양복을 입고 어딘가에 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언제였는지, 무슨 자리였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버리기로 했다.
옷걸이에서 빼는 순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예전에는 물건을 버릴 때마다 어딘가 아쉬운 구석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없었다.
양복 한 벌의 무게가 이 정도였나 싶을 만큼 가벼웠다.
삼십 대 중반에 어떤 일로 크게 화가 난 적이 있다.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는 쓰지 않겠다.
다만 그때의 감정만큼은 분명히 기억한다.
밤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면서 같은 장면을 수십 번 되감았다.
내가 다르게 말했더라면,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그런 문장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반복됐다.
일주일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평생 가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이 분노와 함께 늙겠구나.
그때는 그게 일종의 각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십오 년쯤 지났다.
지금은 그 감정의 윤곽조차 흐릿하다.
화가 났었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그 분노의 온도를 다시 느낄 수는 없다.
기억은 있는데 감각이 없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것 같다.
그 사람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였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언제 사라진 걸까. 정확한 시점은 모른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젯밤의 꿈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어느 날 돌아보니 없어져 있었다.
내가 지운 게 아니다. 시간이 처리한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십 대 초반에 일이 잘 풀리던 시기가 있었다.
뭘 해도 맞아 들어갔고, 체력도 자신감도 넘쳤다.
이 상태가 기본값인 줄 알았다.
앞으로도 이 정도는 유지되겠지, 라고 별 근거 없이 확신했다.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 기세라는 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돌아보면 이미 한참 전에 빠져 있었다는 식이다.
예전처럼 집중이 안 된다거나,
같은 양의 일을 하는데 피로가 더 오래간다거나,
그런 사소한 징후들이 먼저 온다.
하지만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게 징후인 줄 모른다.
전성기가 끝나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항상 사후에 깨닫는다.
아, 그때가 꼭대기였구나.
한참 내려온 뒤에야 비로소 올려다보게 된다.
사람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다.
이십 대 후반에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사람이 없으면 하루가 작동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전화가 오지 않는 저녁은 견디기 어려웠고,
약속이 없는 주말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내 하루의 대부분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관계는 끝났다. 그 뒤에 찾아온 감정의 밀도가 대단했다.
몇 달간은 일상이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음식 맛이 달라지고, 좋아하던 음악이 듣기 싫어졌다.
이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진지하게 들었다.
그런데
빠져나왔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출근길에 문득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는데,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그냥 이름이었다.
아, 끝났구나. 그때 알았다.
다만 한 가지. 그 사람이 자주 가던 골목이 있는데,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길을 지날 때면 걸음이 약간 빨라진다.
감정은 사라졌는데 몸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유효기간이 지난 뒤에도 남는 잔상 같은 것.
3월이다.
겨울과 봄 사이의 어중간한 시기.
아침에는 아직 코트를 입고 나가는데,
오후가 되면 팔에 걸치고 다닌다.
계절도 이렇게 경계 없이 바뀐다.
어제까지는 분명히 겨울이었는데,
오늘 점심에 창문을 열었더니 바람이 달랐다.
따뜻하다기보다는 덜 차가운 정도.
그게 봄의 시작이다. 별다른 사건 없이.
누가 선언하지도 않는다.
감정도 그렇게 바뀌는 것 같다.
잊으려고 애쓴다고 빨리 잊히는 것도 아니고,
붙들려고 한다고 오래 남는 것도 아니다.
제 시간표대로 움직인다.
환절기에 옷장을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지금 나를 차지하고 있는 감정들도 언젠가는 저 양복처럼 될 것이다.
한때 분명히 나의 것이었지만,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맞지 않게 된,
그래서 결국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니, 내보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알아서 나갈 것이다.
감정은 주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그게 위로인지는 모르겠다.
허무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다.
그냥 그런 것이다.
감정에는 유효기간이 있고, 그 기한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양복은 버렸다. 옷장에는 빈자리가 하나 생겼다.
이상하게도 그 빈자리가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옷장이 원래 이 모양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