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속에 비치는 관계의 그림자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나는 집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걸었다.
바람이 부는지, 멈춘 건지 알 수 없는 공기가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횡단보도 한가운데 흰 고양이가 멈춰 나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제와 오늘 사이엔 아무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게 더 피곤했다.
편의점 자동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감쌌다.
나는 에너지 드링크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얼음물과 삼각김밥을 집었다.
영수증은 받지 않았다.
내 삶에서 영수증은 거의 언제나 불필요한 기록이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휴대폰이 울렸다.
김사무장이었다.
그는 과거에 나에게 철인3종을 가르쳐주었고, 지금은 사무장이자 친구였다.
“대표님, 성공보수 말인데요.
의뢰인이 대표님하고만 얘기하겠다네요.”
“그건 네가 처리해야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낮게 말했다.
“대표님, 이번엔 많이 벅찹니다.
바람이 멈췄어요.”
나는 창문을 열어 보았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진작 멈춰 있었는지 모른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구례의 철교 위를 맨발로 달리는데 다리는 계단으로 바뀌었다.
내려갈수록 강은 가까워져야 했지만, 오히려 멀어졌다.
계단 중간마다 바람이 멈춰 서 있었다.
나는 그 막을 손으로 밀어 헤치며 내려갔다.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뒤돌았을 때,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광안리 바닷가.
김사무장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괜찮아.”
“괜찮지 않죠.”
그는 웃었지만 긴장이 묻어 있었다.
“오늘은 달리려고.” 내가 말했다.
“같이 달릴까요?”
“아니. 오늘은 혼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 열쇠를 내밀며 말했다.
“차는 어떻게 할까요?”
“회사 주차장에 두고 와. 키는 사무실에.”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바람이 좀 움직이네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오후, 의뢰인이 찾아와 소리쳤다.
성공보수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했다.
서류에는 그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일정한 간격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는 대칭을 만나면 쉽게 지친다.
그는 ‘대표랑 얘기하겠다’고 했다.
나는 ‘여기가 대표 자리’라고 말했다.
그는 내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조용해졌다.
잠시 뒤 김사무장이 들어왔다.
“잘 해결하셨네요.”
“네가 했어야지.”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표님, 이번 대회… 안 뛰겠습니다.
계단이 자꾸 생겨요.”
나는 그가 말하는 계단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꿈에서 내려가던 그 계단.
삶의 특정 계절에만 나타나는 이상한 구조.
“쉬어도 돼.”
“네.”
그는 눈 밑에 피곤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말했다.
“대표님, 저는 어떻게든 대표님께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게 저를 이상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말은 붙잡는 순간 방향을 잃는다.
저녁이 되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창밖 바다는 묵묵히 바다였다.
사람의 이름이나 계약 같은 건 모두 바깥에 남겨둔 채로.
주차장 계단으로 내려가다 바람이 멈췄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 막을 눌렀다.
따뜻했다.
조금 더 누르자, 막은 밀려나고 다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차 문을 열지 않았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였다.
원룸에 돌아오자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 제한 번호’
받지 않으면 밤은 길어지고, 받으면 더 깊어졌다.
나는 받았다.
“변호사님, 바람이 멈춰요.
계단에서요. 내려갈 때마다.”
전화는 곧 끊겼다.
나는 물을 마셨다.
도시의 물은 늘 약간의 금속 맛을 품고 있었다.
잠에 들자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멈춘 자리마다 손바닥을 들어 막을 밀었다.
오래된 흉터가 손바닥 위에서 빛났다.
계단 끝엔 작은 방이 있었다.
탁자 위엔 호루라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불지 않았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침이 오면, 다시 사무실로 갈 것이다.
성공보수를 확인하고, 사무장의 의자를 낮추고,
전화 목록에서 발신 제한 번호를 고정할 것이다.
저녁엔 물을 마시고, 밤엔 다시 계단을 내려갈 것이다.
멈췄다가, 다시 흐르는 바람.
그 사이를 지나는 일은 내 몫이다.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몫이다.